마취전문간호사의 역할 정립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간호계와 병원계, 보건당국이 미묘한 입장차이를 확인했다.

마취간호사 측은 업무범위에 대해 구체적인 법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입장이지만, 병원협회는 간호계도 양보할 부분은 양보해야 논의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련 하위법령을 마련중인 복지부는 마취전문간호사만을 위한 내용이 아닌, 전문간호사 업무범위를 설정할 것이며, 기본적으로 모법에서 정하고 있는 각 면허의 업무범위가 존중되는 선에서 하위법령을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과 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은 지난 23일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마취전문간호사 역할 정립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동안 의료법에는 전문간호사 자격인증에 대한 규정만 있을 뿐 업무범위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취전문간호사의 마취제공 행위를 기존 보건복지의 유권해석(1991년, 2005년)과는 달리 무면허 의료행위로 간주한 2010년 대법원의 판결은 전문간호사의 활동을 제약하기도 했다. 실제로 대법원 판결 이후 의사의 지도ㆍ감독 하에 수행되는 마취전문간호사의 마취행위도 법적 소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후 전문간호사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해 3월, 전문간호사의 업무범위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공포됐다. 2020년 3월 법령 시행을 앞두고 정부는 전문간호사 업무범위를 마련중이다.

이날 발제에 나선 공미정(Michong Kong Raybon) 미국 남부미시시피대학교 조교수는 한국과 미국의 마취간호사 현황과 업무범위를 비교했다.

공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서 모든 마취제공자들은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마쳐야 한다. 모든 CRNA, 마취전문의 보조(AA), 대부분의 마취전문의는 국가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야 하고 명확하게 수립된 업무범위 하에 업무를 수행한다. 독립적 업무수준은 주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국의 마취제공자는 면허를 받은 의사나 CRNA 뿐 아니라, 학사학위 수준의 마취 수련을 마치지 않았거나 면허 관리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RNA도 업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미국은 5만 4,000명의 CRNA가 실무를 하고 있다. 미국 인구는 3억 3,000만명으로, 인구 약 6,100명당 CRNA 1명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은 인구 5,100만에 CRNA는 620명 정도로 인구 8만 2,000명당 1명 꼴이다.

공 교수는 “물론 의료기관에서는 마취전문간호사 자격증이 없는 마취간호사(RNAs)로 대체하고 있지만, RNA 업무에 대한 어떤 규정도 없고 얼마나 많은 RNA에 의해 마취가 제공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실정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 교수는 “간호사에 의한 마취업무를 관리하는 업무범위를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국가적 정책이 절실히 요구된다.”라며, “마취제공자에 대한 석사 또는 석사 후 과정교육이 적용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 법 제정과 예산 배정을 통해 대학원에서 CRNA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현재 홛동하고 있는 RNA가 CRNA가 되려고 교육받기를 원한다면 교육과 수련과정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정토론에 나선 김미숙 대한간호협회 마취간호사회 정책위원도 현행 의료법은 전문간호사의 자격요건만 정의하고 있을 뿐, 업무범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 않아 현장에서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면서, 의료계의 현실적 요구와 임상현장의 만족도를 고려해 마취전문간호사의 업무범위에 대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김 위원은 또, 마취전문간호사 업무범위가 법제화되면 희망자가 늘어날텐데, 현재 가천대길병원 한 곳에만 마취전문간호사 석사과정이 있어 교육기관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대학원 석사과정 교육기관을 더 개설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마취전문간호사의 수가를 인정해야 병원들도 고용을 활발히 할 것이라며, 정부가 재정적 보상책 마련 및 지원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취전문간호사는 이미 엄격한 기준이 있으므로 업무범위를 정하는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오선영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의사의 의료행위나 간호사의 진료보조행위는 너무나 광범위해서 법률에 정의하지 못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라며, “하지만 마취전문간호사는 자격 인정을 위한 교육제도과 양성과정 등 엄격한 자격기준이 있으므로 일반 간호사의 무면허 의료행위 정리보다 쉬운 과정일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이경희 법무법인 지우 변호사는 직업자유 수행의 측면에서 마취전문간호사의 업무범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병원계는 보건의료 현장에서 일어나는 각 직능간 갈등을 우려하며, 마취전문간호사 측도 일정부분 양보해 업무범위를 설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과 같은 제도가 정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영호 대한병원협회 부회장은 “갈수록 보건의료 직능간 이해다툼이 심해지는 상황이다. 이 토론회에 온다고 하니 의협, 마취의학회에서 가지 말라고 연락이 왔더라.”면서,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다기보다 앞으로 우려스러운 일이 생길수도 있어서 그런거라 짐작된다.”라고 밝혔다.

정 부회장은 “하지만 병원협회는 의사협회나 의학회와는 좀 다르다. 병협은 경영자단체로, 기본 입장은 병원에 속해있는 모든 직능과 직역이 하나의 팀으로 서로 협업하고 직무가 유연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미국 같은 마취전문간호사 제도가 정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제가 활동하는 기관은 쉽지 않을 것이다.”라며, “어떻게 직무범위를 잘 조율하고 제기능을 하도록 할까 하는게 어려운 과제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마취간호사회 측에 조언을 하자면, 어디까지 얻을 수 있고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으면 논의가 한 발짝도 못 나갈 것이라는 점이다.”라며, “병협에서 양보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데, 그 정도로 인력문제에 난맥상이 있다.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두도록 스스로도 생각해보라.”고 제언했다.

한편, 보건당국은 마취전문간호사만이 아닌 전문간호사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모법에서 정하고 있는 각 면허의 업무범위가 존중되는 선에서 하위법령을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승령 보건복지부 간호정책 TF 팀장은 “복지부는 전문간호사 제도 전체에 관심이 있다. 개정 의료법에 따르면 마취전문간호사에 대한 업무범위를 정리하라고 한게 아니라, 2020년부터 전문간호사 제도 관련 조문이 개정됐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홍 팀장은 이어 “전문간호사 제도가 법에서 명확히 규정되며 시행규칙이 법으로 옮겨지고 업무범위가 새로 생기며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하위법령에 담을지 고민중이다.”라며, “현재 하위법령 마련을 위한 연구를 수행중이다. 미국은 임상전문간호사와 마취간호사가 완전히 분리된 형태인데, 우리나라는 전문간호사라는 틀 안에 마취가 포함돼 있는 측면 등이 고려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홍 팀장은 “현행 의료법 체계나 법 개정 취지를 고려해 종합적으로 내용을 정리할 생각이다.”라며, “의료법 개정이 아니므로 기본적으로 상위법령인 의료법에서 정하고 있는 각 면허의 업무범위가 존중되는 하에서 하위법령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일반적인 규정이므로 한 영역만 구체성을 많이 갖거나, 아예 규정하지 않는건 불가능하다. 특별한 상황에 어떤 업무는 할 수 있다 등의 규정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홍 팀장은 “복지부의 기존 유권해석도 있었고, 반대되는 법원 판례도 나왔다. 판례는 개별행위에 대해 각각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라며, “각 직역마다 다양한 갈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업무범위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해석과 판례가 나온다. 대법 판례 이후 복지부도 바뀐 유권해석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올해 내 연구용역을 마무리하고, 내년 3월 하위법령인 시행규칙을 제정해야 하므로 연구용역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겠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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