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규제를 완화해야 오히려 태아생명을 더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법이론적으로는 낙태 규제의 완화가 태아생명이라는 법익 보호를 약화시키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법지대에 방치된 낙태 영역을 적절한 제도적 관리 하에 둬 낙태 예방을 도모함으로써 태아생명의 소실 위험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입법조사처 정치행정조사실 법제사법팀 도규엽 입법조사관은 최근 발간된 ‘이슈와 논점’에서 ‘낙태죄에 대한 외국 입법례와 시사점’이라는 글을 통해 이 같이 밝히고, ▲낙태안전 확보를 위한 법제 마련 ▲낙태 전 상담제도 활성화를 주장했다.

앞서 지난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합헌의견과 위헌 의견의 팽팽한 대립(4:4) 끝에 현행 낙태죄 규정에 대한 합헌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로부터 5년 이상이 지난 현재 낙태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가 있어 다시 심리 중에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은 상태다.

‘형법’은 태아의 발달단계와 무관하게 낙태행위를 전면적ㆍ일률적으로 금지 및 처벌하되, ‘모자보건법’에 위법성조각사유를 둬 예외적으로 처벌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본인ㆍ배우자가 일정한 우생학적ㆍ유전학적 정신장애ㆍ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ㆍ배우자가 일정한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ㆍ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ㆍ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임신 24주 이내에서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받은 때에 한해 의사의 인공임신중절수술이 허용된다.

낙태 허용 방식에 대한 입법례는 ▲임신 후 일정기간 내에서는 임부의 의사에 따른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기한방식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일정한 적응사유가 있을 때 허용하는 적응방식 ▲기한방식과 적응방식을 결합한 방식으로 나뉜다.

우리나라는 ‘모자보건법’에서 ‘적응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생학적ㆍ윤리적ㆍ의학적 적응만 인정되고, 낙태사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적ㆍ경제적 적응은 제외되고 있으므로 낙태를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는 입법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와 고려대학교가 2005년 발간한 보고서에서는 그 해의 연간 인공임신중절 건수를 34만 2,433건으로 추정했고, 보건복지부와 연세대학교의 2011년 발간 보고서에서는 2009년 16만 7,568건, 2010년 10만 8,679건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실제 음성적으로 많은 인공임신중절이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죄로 기소돼 처벌받는 경우는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

실제로 2016년 1심 판결 현황을 보면, 낙태죄 접수건수는 24건, 이 중 집행유예가 13건, 선고유예가 7건, 유기징역이 2건, 재산형이 2건이다. 이는 낙태에 대한 현행의 형법 규정이 거의 사문화되어 낙태의 근절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도규엽 조사관은 “형법상 금지는 계속되는데 실제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형법의 권위가 실추되고 형법에 대한 수범자들의 신뢰가 상실돼 소극적ㆍ적극적 일반예방에 역행하는 결과가 초래될 우려가 있다.”라고 우려했다.

나아가 현행 규정은 태아생명을 강하게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우 엄격하게 낙태를 금지하고 있지만, 그 실효성에 대한 고민과 태아생명의 실질적 보호방안에 대한 모색이 요청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도 조사관은 낙태죄 처벌 완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도 조사관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가 태아생명 보호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규제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은 낙태 관련 현실과 법의 괴리를 줄이고 실효적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임신ㆍ출산을 직접 체험하고 생명과 스스로의 처지 사이에서 고민할 여성의 입장에서 낙태 문제를 바라본다면 헌법적 담론의 차원에서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낙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도 조사관은 “기본권 보장의 관점에서 볼 때, 태아의 생명권도 중요하지만 임부의 자기결정권 및 건강권에 대한 배려 역시 무시할 수 없다.”면서, “현행법상 낙태는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에 상담제도 등의 마련은 물론 낙태 관련 규정의 정비도 부족할 뿐 아니라 비의료기관 혹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적 환경에서 음성화된 시술이 만연됨으로써 임부의 건강ㆍ생명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결국 강력한 낙태 규제가 위험한 방법으로 낙태를 하도록 내모는 형국이라 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기한방식과 적응방식의 결합 헌법재판소는 ‘태아를 성장 단계에 따라 구분해 보호의 정도를 달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해당 결정의 반대의견은 ‘국가가 생명을 보호하는 입법적 조치를 취함에 있어 인간생명의 발달단계에 따라 그 보호정도나 보호수단을 달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도 조사관은 외국 입법례에 비춰볼 때, 현행의 적응방식에 일정기간 내에서 전면적 허용을 인정하는 기한방식을 도입해 결합시키는 방식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적어도 임신 초기에는 낙태를 허용해 줄 필요성이 있다’는 반대의견의 주장에 따라 임신 12주의 범위 내에서는 임부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는 것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태아가 모체에의 의지 없이 독립생존할 수 있는 시기 이후에는 임부의 생명과 건강에 현저한 위해가 발생할 우려가 없는 한 낙태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도 조사관은 낙태안전 확보를 위한 법제 마련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많은 나라가 낙태의 절차, 장소, 시술자 등에 관한 상세 규정을 둬 안전한 환경에서 시술을 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 임부 건강권에 대한 배려로써 낙태 관련 법제 정비를 통해 병원이나 의사 등에 대한 일정한 요건을 마련해 충분한 전문적 처치를 받음으로써 의학적으로 안전한 낙태시술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또, 태아생명의 실질적 보호를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서 낙태 전 상담제도의 활성화를 제안했다.

도 조사관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상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면서, “상담절차를 거치면서 임부는 심사숙고할 기회를 갖게 되므로 상담제도는 태아생명의 보호에 기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우리 실정에 맞는 실효적 상담제도를 정립할 필요가 있는데, 낙태에 대한 강한 형법적 규제 아래에서는 상담제도의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부가 상담제도를 이용함으로써 형사사법제도의 감시망에 잠재적 범죄자로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 조사관은 “태아생명 보호에 현실적으로 기여할 낙태 상담시스템의 활성화는 형법적 규제 완화를 전제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라며, “결국 법이론적으로는 낙태 규제의 완화가 태아생명이라는 법익 보호를 약화시키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무법지대에 방치된 낙태 영역을 적절한 제도적 관리 하에 둬 낙태 예방을 도모함으로써 태아생명의 소실 위험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낙태 관련 외국의 입법례를 살펴보면 프랑스는 ‘공중보건법’ 제L2211-1조부터 제L2223-2조에서 임부의 동의에 따른 낙태를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임신 12주의 기간 내에서는 곤궁한 상황에 처해있는 임부는 의사에게 낙태를 요청할 수 있다. 임부로부터 낙태의 요청을 받은 의사는 임부에게 낙태의 방법과 위험성 및 후유증 등에 대하여 설명을 해 줄 의무가 있다.

임부가 낙태를 행하기 위해서는 1주일의 숙려기간이 필요하다. 한편 의학적인 필요에 의해 임부가 낙태를 할 때에는 임신기간에 상관없이 시행이 가능하다.

독일의 경우, ‘형법’은 제218조에서 낙태 처벌규정을 두고, 제218조a에서 불가벌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우선 임부가 낙태를 요청하고 시술 3일 이전에 상담사실증명서의 제시로써 시술의사에게 상담사실을 입증했으며, 임신 12주 미만의 기간 내에 의사에 의해 시술된 경우 낙태죄의 구성요건 해당성이 배제된다.

또 임부의 동의 하에 의사가 시술한 낙태는 임부의 현재와 장래 생활관계를 고려한 의사의 진단에 의할 때 임부 생명에 대한 위험 또는 임부의 육체적ㆍ정신적 건강상태에 대한 중대한 훼손 위험을 방어하기에 적절하고 다른 기대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험을 방어할 수 없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위법하지 않다.

아울러 의사의 진단에 의할 때 임부에게 아동간음ㆍ강간ㆍ준강간행위가 범해졌고, 그로 인한 임신으로 인정할 만한 유력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로서 임신 12주를 경과하지 않고 임부의 동의 하에 의사에 의해 시술된 낙태도 위법하지 않다.

나아가 임신 22주 미만의 시기에 의사와의 상담 후에 의사에 의해 시술된 낙태의 경우 임부에 대해 형을 면제하고, 법원은 임부가 낙태시술 당시 특별한 곤궁에 처해있었던 경우 형을 면제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형법’은 제96조에서 동의낙태에 대한 처벌규정을 두고, 제97조제1항에서 동의낙태에 대한 불가벌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우선 임신 12주 미만인 때에 의사의 상담을 거친 후 의사가 시술한 동의낙태는 벌하지 않는다.

또한 임부의 생명에 대한 달리 피할 수 없는 심각한 위험 또는 임부의 육체적ㆍ정신적 건강에 대한 중대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낙태가 필요한 경우, 태아가 육체적ㆍ정신적으로 크게 손상되됐을 심각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임부가 임신 당시 미성년자였던 경우에 의사가 시술한 동의낙태는 벌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직접적이고 달리 피할 수 없는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임부를 구하기 위한 낙태의 경우 동의낙태는 물론, 동의취득 불가상황 아래의 부동의낙태도 벌하지 않는다.

영국은 ‘낙태법(Abortion Act 1967)’ 제1조⑴에서는 2인의 등록된 의사들이 ▲임신 24주 이내에서 임부나 임부의 자녀 또는 임부 가족의 육체적ㆍ정신적 건강에 대한 훼손 위험이 낙태하는 때보다 임신을 지속하는 때에 더 큰 경우 ▲임부의 육체적ㆍ정신적 건강에 대한 중대한 영구적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낙태가 필요한 경우 ▲임부의 생명에 대한 위험이 낙태하는 때보다 임신을 지속하는 때에 더 큰 경우 ▲태아가 만약 출생된다면 심각한 장애에 이를 정도의 육체적ㆍ정신적 이상으로 고통받을 상당한 위험이 존재하는 경우 중 하나의 사유에 해당된다고 판단한다면 등록된 의사에 의해 이뤄진 낙태에 대해서는 벌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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