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처음으로 서구문명을 접한 것은 에도 혹은 도쿠가와 시대로 19세기 중후반인 1868년 쇼군의 지배체제하의 경제 사회 문화적 전성기와 더불어 당시 일본의 고립주의와 함께 엄격한 사회적 질서가 유지된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의사의 사회적 위치는 사무라이 계급보다 낮은 하위계층으로 지역마다 자유로운 형태의 직업인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일본은 공중보건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였고, 의사는 아픈 환자와 개인적 관계가 중심인 반면에 사무라이는 직급에 따라 관할 지역의 봉건영주로 일종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사는 주로 ‘공중(Public)’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현대적 개념에서 보면 평상시에는 공무원의 역할을 유지하면서 전시에는 군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공인인 셈이다.

과거 일본의 의사들이 서구의 의학을 접하였기는 하였으나 서구처럼 의사들이 모여 길드를 형성하지는 않았고, 의사의 지역별 이동도 자유로워 의사가 되기 위하여 학생들이 여러 곳을 방문하며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고 통상적인 일이었다.

물론 의사 지망을 원하는 학생의 친부는 당연히 의사였다. 일본 의사는 대부분 산술점성가(mathematical astronomer) 집안과 같이 대를 이어 물려주고 이어받는 세습제가 기본이었다고 한다.

사무라이는 일종의 무관 엘리트(military elite)집단으로 세습제 형태로 조상의 공적에 따라 자손들의 직위와 급여가 결정되었다.

장인과 상인들도 대부분 대를 이어 세습하는 방식이었고 신분이나 계층의 이동은 지금도 쉽지 않다고 한다.

▽에도시대 일본의 서양의학 기초과학 등 타 분야 학문과 융합 국가 근현대화 원동력
에도시대 3대 전문직을 꼽으면 유학자(confucian scholar), 의사, 그리고 산술점성가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 필요한 전문직이었고 사무라이 계급 아래에 위치하였다. 에도시대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데 의사들의 기여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타 직종에 비하여 비교적 자유로웠고 서구의학을 접하면서 깨닫게 된 기초의학이나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의 중요성과 외국어에 대한 필요성이 상당수 의사가 의사의 신분에서 서구의 언어나 과학을 전파하는 교육자 역할을 하여 일본사회의 계몽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도쿠가와 시대 의사의 영향은 조직적이지 못하였고, 정식으로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운영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전통적 의학은 중국의 양향을 받아 궁중과 관료주의 속에 성장하여온 문화로 서구의 ‘과학적 의학’이 ‘기술적 의학’으로 자리 잡았으나 전통적 동아시아의 도덕관이 당시 의학을 자연스레 지배하여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일본의 의학은 서구의 지성과 학문의 정신으로 계승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해하면 맞을 것 같다.

중국이 아편전쟁(1839~1842)에서 패배하고, 이어서 미국의 페리호가 일본에 진입하여 개방을 요구함에 따라 당시 사무라이 계급으로서는 일본의 국가방위를 위해 서구 과학의 힘의 필요성을 재빨리 인지하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이었고 전쟁이 발발하면 자동적으로 군인으로 변신하는 전통 무사집단으로 시대의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고 의사들이 설립한 서구학문 교육기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받은 비정규 단기 교육을 통해 서구식 대포를 구입하거나 어느 정도는 직접 제조도 가능하였으나 이런 교육의 한계를 인지하면서 서구 군사교육의 정통성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도쿠가와 가문에 반대를 시도하는 사무라이에 의하여 에도시대를 마감하는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 사무라이에게는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것이 곧 사무라이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바뀌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근대적인 서구식 교육기관이 생기면서 점차 의사에 의한 일본사회의 계몽이 사무라이 지배계층으로 주도권이 이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의 핵심 권력을 쥔 가문으로부터 급여를 받아왔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를 금하게 된다.

이로 인해 당장 생계에 문제가 되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은 기존의 세습제인 의사나 장인, 농업 분야의 기득권 분야의 침투보다는 새로이 등장하게 된 과학과 기술 분야에 눈을 돌려 새로운 영역에 활발히 진출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습이 아닌 신학문 분야인 이공계열의 초창기 졸업생은 거의 대부분 사무라이 계급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공중’의 사안이 주된 관심이던 사무라이 정신이 새로운 과학기술의 역량이 합쳐지면서 사무라이 정신에 의한 일본의 근현대화에 큰 힘을 받아 박차를 가하게 된다.

▽독일식 의학교육과 고등교육 분야 사무라이 지배층 영향력 가세 신 엘리트 파워 형성
서구는 전통적으로 의학과 법학 분야에 상류층 계급이 주류를 이루었고, 중산층에서는 주로 과학과 기술 분야의 진출 현상과는 역으로 일본에서는 상류 지배계급이 이공계를 접수하고 그 아래 계층이 의학과 법학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메이지 유신의 일본 근대화 작업이 사무라이 지배층이 주도하게 되었다. 의사들에 의한 비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였던 민간 계몽운동이 사무라이 지배층이 주도하는 정규 학교 교육으로 전환되며 일본사회의 근대를 본격적으로 이끌게 된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890년 동경대 입학생 중 당시 일본 전체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있던 사무라이 계층의 분야별 입학현황은 의학이 40.8%, 법학 68.3%, 문학 75%, 과학 80%, 공학(Engineering) 85.7%의 점유율을 보였다.

군사 엘리트들이 고등교육 분야에 대거 포진하고 있는 당시의 일본사회 풍경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의학이 공학에 비해 비교적 낮은 이유는 일본의 의사는 세습제였던 사실이 여전히 의사집단의 자손이 의사가 되기 위하여 입학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의과대학은 초창기 독일 프로시아의 군의관학교 교관이 파견되어 독일식 의학교육의 정착을 도왔다.

이런 점을 보면 일본의 고등교육에 담겨있는 일본 사무라이 지배계층의 영향은 현재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고등교육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전문직 교육의 출발에 사무라이출신 교수들에 의한 영향이 우리나라 전문직 교육 곳곳에 배여 있는 것이다.

사무라이 정신이 나쁘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의사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일본은 지난 1949년에 물리학상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일본 국적으로 25인이 노벨상을 수상하였으며 경제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수상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 외에 3인의 일본인은 다른 나라의 국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사무라이 정신과 일본이 갖고 있는 장인정신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서구사회의 전통적 좋은 삶의 철학인 수월성(Excellence) 추구 정신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식민체제 우리나라 전문직 불행한 출발 아직도 전문 직업성 분야 발달장애 현상 보여
우리나라의 전문직 출발은 불행하게도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된 식민교육이 조선인의 황국신민화, 공공연한 차별화, 저급상인 양성과 이성적 진보를 막는 고급학문 진입제한의 식민정책으로 우리나라의 고등교육 특히, 전문직 양성을 위한 교육에 부정적인 모습을 진하게 남겼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맞물려 현재의 전문직 교육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미 해방 70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 같은 유사한 전문 직업성이나 우리의 문화에 맞게 형성된 전문 직업성이 아직도 뚜렷하게 형성되거나 발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남자 의사는 군의관 출신의 군사문화와 해방 이후의 독재주의, 그리고 변형된 유교문화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차별 문화 등이 혼합되어 지독한 수직적 구조의 ‘의국문화’를 만들어 내며 현재도 의국내의 언어적 또는 신체적 폭력이나 다양하고 구조적인 폭력과 차별정신은 가히 현대적 전공의 교육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의료정책도 결국 일제 사무라이 지배층의 아래에 위치하던 의료인의 전통이 현대의 우리나라에서 정부 관리의 통제를 받는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이제 의사의 근로자적 신분마저 위협을 받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일본에서 의학전공을 위한 사무라이의 진입은 일본의사의 사회적 계층의 형성에서 일본의사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었다는 의견이 제기될 만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의사는 본래 중인계급에서 왔고 극소수의 의사가 문도 아니고 무도 아닌 속칭 잡과 출신의 관리가 되었다. 

이런 연유인지 현재도 서구의 의학이 보여주는 전문직의 사회적 위치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사의 인식은 매우 취약해 보인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느 의학교육자는 일본의 무사도 정신과 현대적 의사의 전문 직업성을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왜 이런 비교를 하였을까?

당시엔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일본 의사의 전문직업화 과정을 보며 지금도 일본의 고등교육 진출은 여전히 사무라이 계층의 자제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의 계층에서 본래 정착된 엘리트 정신을 자신들의 문화에 고유하게 사용해도 된다는 주장임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일본 역시 길드도 없었고 의사 집단이 모여 어떤 단체를 구성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현재도 발달 진행 중이며, 서구의 단체적 전문 직업성과는 매우 다른 궤적을 보이는 분야도 많아 보인다. 

▽시대착오적 의사 양성 전문 직업성 기틀 갖추지 못하면 ‘엘리트 패닉’ 우려할 상황
같은 동아시아라도 후 식민 문화의 종주가 어느 나라였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의료문화나 의학교육문화를 보인다.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은 유럽의 식민국가로 이들 나라의 의학교육과 한국을 비롯한 타이완, 중국의 그것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배워야 하는 내용이나 실제 의료 직무에서 보여주는 유사성은 존재한다. 의학교육의 표준도 세계화에 따라 점차 합치점에 접근 중이다.

그러나 의학교육 문화나 의료문화는 표준이나 기준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체계적인 전공의교육이나 의사단체의 역할은 식민일본 의학교육의 산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전공의 교육의 주체를 의국이라는 묘한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타이완과 중국은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고 하여도 판공실(사무실)이 기본 단위다. 

우리의 의학교육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정확히 하면 현재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남겨진 부정적이고 어두운 모습의 근원이 비춰진다.

지금은 조금 개선된 일본의 인턴 제도를 보며 협치가 근간인 인턴이나 학생 임상실습 교육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참으로 난제로 보인다.

한편, 의국 중심의 전공의 교육이 개선되지 않은 한 이런 교육의 개선은 난공불락처럼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 병원협회와 전공의협회와의 좌담에서 보여준 시각차는 지구와 화성에서 온 외계인과의 대화처럼 들린다.

잘못 만들어져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시대착오적 전공의 교육의 지배구조(governance)를 보면, 전공의교육의 현대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참고문헌: Shigeru Nakayama. The Orienta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A Japanese view. Gobal Oriental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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