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는 초기엔 치료제 접근성과 정보가 필요하고, 장기 생존단계에서는 경제적 부담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암 경험자의 생존단계에 따른 필요를 이해하고, 이를 위한 정책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보건사회연구’ 39권 4호에서 서울대학교 김다은ㆍ김혜림ㆍ양동욱ㆍ강은실ㆍ김진현 교수, 경상대학교 배은영 교수는 ‘암 경험자의 생존단계별 필요에 관한 질적 연구’를 통해 이 같이 밝혔다.

연구팀은 암환자와 보호자를 대상으로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사용해 자료를 수집했다. 이들은 암 경험자의 필요를 초기 생존단계와 장기 생존단계로 나눠 탐색하고, 사회적지지가 생존 시기에 따라 적절하게 제공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 초기 생존단계는 적극적인 치료를 받는 시기로 이 단계의 연구참여자로부터는 치료 접근성 향상이나 치료제 관련 정보 요구, 비급여 치료비 부담, 가족 간병부담 등에 대한 필요가 주요하게 도출됐다.

치료 접근성 향상에 대한 필요는 항암치료 과정에 있는 초기 생존단계에서 도출됐는데, 연구참여자는 항암 신약에 대한 접근성 향상과 이를 위한 제도의 경직성 완화를 요구했다.

개발된 신약이 안전성 및 유효성 확인과 비용효과성에 대한 검토를 거치고 제도권 내로 들어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치료제의 시급한 사용은 다른 치료 대안이 없는 중증질환자에게는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외에서 허가받은 치료약이지만 국내에서는 사용할 수 없어 해외원정 치료를 받는 환자의 수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판 허가 전인 항암신약의 경우 환자는 임상시험 참여를 통해 치료약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국내 의약품 임상시험 건수는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그 중 항암제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러한 임상시험 규모의 증가와 더불어 질적인 향상을 위해 ‘임상시험 발전 5개년 종합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연구팀은 “우선적으로 수행될 과제는 피험자에 대한 윤리적 보호 및 안전성 관리 체계의 확립으로,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환자에게 임상시험 정보와 동의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피해보상 과정에 도움을 제공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라고 제언했다. 이와 더불어 임상시험에 대한 체계적인 환자 교육과 인식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된 바 있다.

또한 임상시험에 참여하지 못하는 환자더라도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을 통해 임상시험용의약품을 치료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안전성 및 유효성이 확보되지 못한 임상시험용의약품을 치료 목적으로 사용할 때에 반드시 그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신중히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다만, “이 제도는 국내 임상시험계획이 인정된 의약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미국, 유럽, 호주 등 국가의 의약품 동정적 사용제도와 비교했을 때 그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라 할 수 있어 환자의 치료 접근성 향상을 위해 제도 확대 방안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의료비 부담 영역에서 초기 생존단계의 연구참여자는 산정특례제도로 급여 의료비에 대한 부담은 경감됐으나, 비급여 의료비 비율과 민간보험 가입 여부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경제적 부담의 정도가 달랐다.

장기 생존단계의 연구참여자는 5년의 중증질환 등록이 만료돼 산정특례제도의 혜택도 종료되면서 의료비 부담이 증가한 것을 느끼고 있었고 오랜 투병기간 동안 누적된 비용 지출과 직업상실로 인해 생계유지 곤란, 미충족 의료 등을 경험하고 있었다.

초기 생존단계의 의료비 부담에서 비급여 영역의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는데, 연구가 수행된 시점인 2017년 ‘비급여의 급여화’를 목표로 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이 추진되면서 비급여 의료비 부담을 낮추려는 정책적 노력이 이뤄졌다.

구체적으로 선택진료비 폐지, 2~3인 상급병실비 보험 적용, 간호ㆍ간병통합서비스 확대 등 3대 비급여 영역에 대한 보장성 강화가 추진됐고, 비급여 중에서 규모가 컸던 초음파와 MRI, 항암제를 포함한 비급여 약제의 급여전환이 점차 진행되고 있다.

또한 본인부담상한제와 재난적의료비 지원사업도 일부 개선되어 수혜 대상자 범위가 확대되는 정책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연구팀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의 실질적인 정책 효과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연구 분석이 필요하며, 건강보험 보장률이 여전히 OECD국가의 평균인 80%에 못 미치는 만큼 보장성 강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초기 생존단계에서 항암화학요법 부작용에 대한 관리 비용도 의료비 부담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는데, 생식세포보존 비용이나 항암제 부작용으로 인한 탈모 치료비용이 언급됐다.

암환자의 생식세포보존의 경우 국외사례를 살펴보면, ‘American Society of Clinical Oncology(ASCO)’와 ‘European Society for Medical Oncology(ESMO)’는 암환자에게 항암화학요법이나 방사선요법 치료 전 가임력 보존을 위한 정자냉동보존과 배아ㆍ난자 냉동보존을 권장하고 있고, 영국, 덴마크,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에서는 암환자의 가임력 보존 치료를 급여로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가임력 보존 치료가 급여 적용되지 않고 있으며, 암 경험자의 삶의 질 향상 측면에서 가임력 보존에 대한 교육과 치료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연구팀은 “현재 각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암환자에게 항암치료 전 가임력 보존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의료기관이 환자의 가임력 보존을 위한 치료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가임력 보존 치료에 대한 급여 적용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제언했다.

한편, 장기 생존단계는 암 진단 이후 5년 이상 경과하고 급성기 치료가 끝난 단계로, 장기적인 치료비용 부담으로 인한 생계유지 곤란과 직장복귀에 대한 지원, 사회복귀 프로그램 요구 등의 필요가 나타났다.

장기 생존단계의 의료비 부담은 치료비용 자체보다도 암 진단부터 시작된 의료비 지출이 오랜기간 지속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축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초기 생존단계의 연구참여자도 당장 지출되는 치료비용은 감당할 수 있으나 이러한 비용지출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암 진단 이후 5년 이상 경과한 여러 연구참여자는 장기적인 의료비 지출로 “먹고 살아”갈 문제에 봉착해 있었으며, 정기검진도 포기할 만큼 의료비 부담을 경험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가 공통적으로 필요로 하는 바는 치료비용을 경감하거나 돈을 지원받는 단기적인 의료비 지원을 넘어 장기적 관점에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근본적인 방안의 마련이었다.

장기 생존단계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부담은 암환자가구가 질병으로 인해 근로소득이 감소되고 치료 이후 직장에 복귀하지 못하면서 장기적인 가계부담을 경험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연구참여자 대부분이 가구주였는데, 암 진단 후 치료와 직장생활을 병행하지 못하고 실업해 고정 수입이 없는 상태였으며, 생계유지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가족보호자가 간병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근로조건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어질 경우 가계부담이 더욱 가중된다고 호소했다.

이는 양적연구 결과에서도 나타난 바 있는데, 암환자가구의 가구주가 실업상태일 때 과부담의료비 발생 확률은 2.17배로 높아지게 되며, 암환자 뿐만 아니라 생산성이 있는 가구원이 간병으로 인해 노동참여를 못하는 경우도 근로손실비용으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연구참여자는 암 경험자의 노동참여에 대하여 사회적지지를 요구했다.

초기 생존단계의 연구참여자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직장생활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결국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으며, 항암치료와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필요로 했다.

치료 이후 어느 정도 신체가 회복돼 직장으로 복귀하려는 장기 생존단계의 연구참여자는 체력적 한계로 일반적인 노동 조건으로는 일할 수 없었으며 질병력으로 인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지지를 요구했다.

암 경험자의 직장복귀 경험에 대한 질적 연구에서도 치료와 업무의 병행 가능여부와 육체적 노동 강도가 암 경험자의 직장생활 유지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직장동료로부터 암 경험자에 대한 편견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암 경험자의 직장생활 유지와 직장복귀는 개인에게는 경제적 안정과 자아존중감을 회복시키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생산 활동이 가능한 암 경험자의 노동참여를 지지해 사회적 손실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정책 현안이다.”라고 전했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장애인의 범주에 암환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질병력으로 인해 고용에 차별받지 않도록 규정하여 암 경험자의 고용기회 평등을 보장하고 있다.

일본 역시 2016년 후생노동성에서 암 치료와 직장생활의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사업장에 배포했고, 환자가 주치의로부터 소견서를 받아 사용자에게 제출하면 유연근무나 휴가, 업무배치에서 필요한 조치나 배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고용정책기본법’ 제7조 제1항에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한 질병력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을 뿐 처벌 규정은 없으며, 암 경험자의 노동참여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미비한 상태이다.

국가암관리종합계획에서 암통합지지체계에 대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직업재활 및 직장복귀를 위한 프로그램개발은 여전히 부재하며, 기타 사회적지지 체계도 시범사업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연구팀은 “암 경험자의 신체적 능력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증상관리, 취업연계프로그램, 고용자 관점을 고려한 근로환경개선 등의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라고 제언했다.

연구팀은 “암 발생률과 생존율이 높아짐에 따라 암에 대한 병리적 치료를 넘어 암 경험자가 사회구성원의 한명으로서 생존해 나가기 위한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면서, “암 경험자에 대한 국가정책의 기능과 역할이 확대되고 암 경험자를 위한 사회적지지가 치료 영역을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요구되는 만큼, 실효성있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이고 섬세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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