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실손의료보험금 청구 간소화 법안에 찬성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 알려지면서 의료계와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고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중계기관으로 하는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법안에 대한 금융위원회의 입장이 기존 신중검토에서 동의 입장으로 변경됐다.

해당 법안은 지난해 9월 고 의원이 대표발의한 ‘보험업법 일부개정안’으로, 실손보험금 청구시 영수증 및 진료비 내역서가 의료기관과 심평원 간에 구축된 전산망을 통해 보험사에 전송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고 의원은 지난 3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국무총리에게 해당 문제를 지적하고, 10월 국정감사에서 국무조정실장을 비롯해 금융위원장에게 지속적으로 법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변화를 요구해왔다.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최근까지도 실손의료보험 청구전산화를 담은 보험업법에 대해 신중검토 의견을 제시했지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 개최 전날 동의 의견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고 의원은 “개인정보보호, 시스템구축비용 등을 고려한 결과, 심평원이 최적의 중계기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다만 금융위원회는 중계기관을 심평원에 위탁하는 경우, 의료계가 심평원의 정보집적 및 향후 비급여 의료비용 심사 등을 우려하고 있는 만큼, 서류전송 업무 외에 다른 목적으로 정보를 열람 및 집적할 수 없도록 법률에 명시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혀 수정안 통과가 예측된다.”라고 전했다.

고 의원은 또, “3,400만명의 국민이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이라 불리는 실손의료보험의 보험금 청구절차가 불편한 이유로 보험금을 포기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된 가운데 국회로 공이 넘어갔다.”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의료계와 시민단체는 거세게 반발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24일 성명을 내고, “보험업계는 실손보험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소비자가 더 쉽게 보험 청구를 할 수 있도록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가 않는다.”라며, 숨어 있는 의도를 의심했다.

의사협회는 “보험사 입장에서는 청구 간소화가 되면 의료기관으로부터 보험사가 원하는 환자의 건강과 질병 정보를 마음껏 신속하게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면서, “일차적으로는 환자가 보험금을 신속하게 수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보험사는 환자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환자의 새로운 보험 가입과 기존 계약 갱신을 거부하거나 진료비 지급을 보류할 수 있게 된다.”라고 주장했다.

의사협회는 “보험업법 개정안은 이렇듯 겉으로는 국민의 편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실손보험 적자로 흔들리는 보험업계를 위한 특혜다. 동시에 보험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인 의료기관에게 부당하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물론, 의료기관이 지켜야 할 환자의 정보를 아무런 통제 없이 보험사가 요구하는대로 제출하게 하는 악법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개정안은 심평원이나 제3의 중계기관을 통해 의료기관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험사로 전달하게 했는데, 이는 결국 보험금 청구과정을 간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하게 하는 것이며, 심평원이나 중계기관에서 민감한 개인정보가 누출되거나 오히려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의사협회는 보험업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며, “정말 환자의 청구 간소화를 통해 소비자의 권리를 신장시키려면 실손보험사가 먼저 청구를 위해 필요한 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세우고 보험사에 상관없이 통일된 청구방법과 서류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도 지난 25일 성명을 내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에 역행하는 보험업법 개정 논의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참여연대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로 운영되는 의료기관이 민간실손보험 청구를 수행할 의무는 없으며, 개인의 의료정보를 민간보험사에 제공하는 것은 의료법 위반이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은 “개정안 내용이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과 역행하는 것은 심각하게 우려스럽다.”면서, “사회연대에 기초해 보편적으로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공적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 우선시 돼야 하며, 개인이 임의로 가입해 사적으로 부담하는 보험료에 기초한 민간실손보험을 강화하는 개정안 논의는 공적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에 역행하는 것으로 즉시 중단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참여연대는 “보험업법 개정안은 민간실손보험 청구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명목하에 의료기관이 직접 보험료를 청구하도록 하고 있는데, 여기에 심평원 내지 전문중개기관을 중개기관으로 둘 수 있도록 했다.”라며, “이는 개인의 의료정보를 보호하고 있는 의료법 제21조를 위반하는 것으로 보험업법 개정안만으로 처리될 사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심평원은 건강보험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인데, 민간실손보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국민이 부담하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며, 국민건강보험법상 심평원의 기능과 책무에도 부합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참여연대는 아울러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여 국민 누구나 의료 이용의 차별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개정안에서는 민간실손보험이 건강보험을 보완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상정해 건강보험에서 보장성을 넘는 일정 부분에 대해 민간실손보험을 보완재 내지 대체재로 간주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는 현 정부가 비급여를 급여화해 건강보험의 보장률을 높이겠다는 국정과제 약속 이행을 파기한 것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귀결된다는 지적이다.

참여연대는 국회를 향해 민간실손보험 강화 내용의 보험업법 개정 논의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정부에는 건강보험의 국고부담률 준수와 고령화에 따른 중장기적 재정투입 확대 등  지속적인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분명히 하고, 건강권 보장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보험업법 개정을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도 지난 24일 성명을 통해 “보험가입자 편의성 핑계로 보험업계 숙원사업 해결하려는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을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금융위원회의 입장 선회는 문재인 대통령이 데이터 규제완화와 의료 민영화를 정부 차원에서 또다시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그러나 실손보험 청구간소화 법안 개정안은 겉으로 보험가입자의 편의성을 앞세우지만, 보험업계의 숙원사업 해결을 위한 법안이며, 보험가입자의 개인정보 활용성 등에 주된 초점을 둔 법안이다.”라고 우려했다.

청구간소화 필요성의 경우 보험가입자는 실손보험 청구 절차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금액이 크지 않아 청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민과 환자를 위해서는 이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이어 “문재인 정부는 민간 실손의료보험을 규제한다고 공약해 놓고, 이제 보험가입자의 편의성을 빌미로 실손보험을 건강보험의 경쟁보험으로 아예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활용하도록 해 민간보험사의 비용 부담도 덜어주겠단다.”면서, “민간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로 실손보험을 아예 ‘제2의 건강보험’으로 만든다면, 문재인 정부가 그간 주장한 보장성 강화니 건강보험 공공성 확보 등은 모조리 사기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라고 일침했다.

한편, 보험업계는 현행 실손의료보험 청구체계가 피보험자와 요양기관, 보험회사 모두에게 불합리한 제도라며, 청구간소화를 주장하고 있다.

보험연구원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이 지난 2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인슈어테크와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 정책토론회’에서 조용운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피보험자가 보험금 청구를 위한 증빙서류를 요양기관으로부터 서면으로 발급받아 보험회사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는 현재 실손의료보험금 청구 체계는 이해당사자인 피보험자, 요양기관, 보험회사 모두에게 불합리한 제도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 연구위원은 “요양기관이 증빙서류를 온라인상에서 보험회사로 직접 전송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이뤄진다면 피보험자의 불편과 시간 소모 그리고 미청구 사례가 줄어들며, 요양기관의 행정력을 아낄 수 있고, 보험회사는 지급행정 비용 및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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