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 제15조제1항은 의료인에게 진료거부금지 의무를 부과하면서도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허용하고 있다.

이 조항이 존치하는 한 진료거부 논쟁의 핵심은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무엇인가에 있다.

의료법은 정당한 사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진료거부와 관련한 법원의 판단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진료거부와 관련한 판례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아 판례만으로는 정당한 사유를 유형화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의료정책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진료거부금지 의무의 현황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진료거부가 정당한 판례가 일부 소개되고 있다.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 인정한 판례는?
먼저, 이 보고서는 의료인에게 진료거부금지 위반죄가 인정된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전제했다.

현실적으로 의료현장에서 의료인이 의료기관을 방문한 환자에 대해 진료를 거부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

또, 만약 진료를 거부당한 환자는 다른 의료기관을 방문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진료거부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판례상 확인할 수 있는 진료거부의 문제는 환자가 전원 또는 퇴원 조치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거나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경우, 의료기관의 폐업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 등에서 발생한다.

결국 의료법상 진료거부금지 조항의 입법취지에 해당하는 무분별하거나, 부당한 진료거부는 현실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현재 진료거부금지 조항은 상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퇴원 조치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행정력의 낭비만 초래할 뿐이라는 게 이 보고서의 판단이다.

이 보고서는 오히려 진료거부 금지 조항을 악용해 환자 측에서 의료인에게 마약류 의약품과 같은 부적절한 처방을 요구하거나, 의료기관에서 난동을 피우는 등의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진료거부에 관한 법원의 판단을 확인할 수 있는 판례를 보자.

대법원 92누9180 판결(1992.10.27. 선고)은 의사가 타병원에서 응급조치받은 후 이송돼 온 뇌손상환자에 대해 수술 후에 집중치료할 중환자실의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타병원으로의 전원을 권유한 경우였는데,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받았다.

서울지방법원 92고합90, 145 병합판결(1993.1.15. 선고)은 환자가 해당 병원에서 보험치료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일반환자로라도 치료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다른 병원으로 간 경우여서 정당하다고 인정받았다.

대법원 99다48245 판결(2000.9.8. 선고)은 전원 결정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을 뿐, 당해 병원에서 수술할 것을 요청하지 않은 경우여서 정당한 사유로 인정받았다.

서울동부지방법원 선고 2012 가단67345 판결(2013.7.24.)은 입원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할 필요성이 없어 의료기관이 환자에게 퇴원을 요구한 경우였는데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창원지방법원 2013구합985판결(2014.9.26. 선고)은 의료기관 폐업 과정에서 입원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킨 경우였고, 헌법재판소 2018헌마176 결정(2018.8.30.)은 대기중이던 환자들이 호송차량 이동시간에 맞춰 부대에 복귀하는 바람에 부득이 진료하지 못한 경우를 인정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보고서는 ‘법원이 진료거부 당시 의료인 측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환자 측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기타 참고할만한 정황이 있었는지 등을 종합해 진료거부금지 의무위반을 판단한다’고 봤다.

▽진료거부 금지 개선 방안은?
먼저, 보고서는 의료법 제15조제1항 삭제 의견을 제시했다.

진료거부금지 의무는 직업윤리적 의무로서 이러한 윤리위반을 범죄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응급의료법상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거부금지 의무는 존속시키되, 의료법상 일반환자에 대한 진료거부금지 의무(의료법 제15조제1항)와 이에 대한 처벌 조항(제89조제1호)은 삭제함으로써 의료계약에 관한 불필요한 논쟁을 불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시했다.

보고서는 무엇보다 진료거부금지 조항이 없더라도 의료인이 무분별하게 진료거부를 할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환기시켰다.

무분별한 진료거부 행위는 의료인의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행위(의료법 제66조제1항제1호)로 평가받을 여지가 있으며 의료인이 부당하게 진료를 거부해 국민건강에 위해를 초래한 때에는 보건복지부장관 또는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이 시정명령을 할 수 있으므로(제63조제1항) 여전히 적절한 제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 예시적 규정을 두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의료현장에서 의료인이 불가피한 경우 당당하게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의료법 및 하위법령에서 의료인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한국당 김명연 의원은 올해 3월 11일 진료거부가 가능한 사유를 구체화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진료거부 사유로 ▲의료인이 질환 등으로 진료를 할 수 없는 경우 ▲의료기관의 인력ㆍ시설ㆍ장비 등이 부족해 새 환자를 진료할 수 없는 경우 ▲예약된 진료일정으로 인해 새 환자를 진료할 수 없는 경우 ▲난이도가 높은 진료행위에서 이에 필요한 전문지식 또는 경험이 부족한 경우 ▲다른 의료인이 환자에게 이미 시행한 치료 내용을 알 수 없어 적절한 진료를 하기 어려운 경우 ▲환자가 의료인의 진료행위에 따르지 않거나 의료인의 양심과 전문지식에 반하는 진료행위를 요구하는 경우 ▲환자나 환자의 보호자가 위력으로 의료인의 진료행위를 방해하는 경우 ▲의학적으로 해당 의료기관에서 계속적인 입원치료가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돼 환자에게 가정요양 또는 요양병원ㆍ1차 의료기관ㆍ요양시설 등을 이용하도록 권유하고 퇴원을 지시하는 경우 등을 규정했다.

보고서는 개정안의 진료거부 사유에 동의하면서도,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를 의료법에 규정할 경우, 규정된 사유 외에는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차선은 될 수 있어도 최선은 될 수 없다고 봤다.

보고서는 “의료인과 환자 간의 신뢰가 깨진 경우 또는 환자로부터 비용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 등에 있어서는 진료거부가 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된다.”라며,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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