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교수직의 생산직化, 그리고 그릇된 착대(錯大: 쪼다) 리더십

‘문케어’로 인한 대학병원 환자 쏠림현상이 최근 의료계 안팎에서 우려 섞인 센 화두로 오르내리고 있다.

공공의 영역에 민간자본이 진입하여 비영리 의료기관과 의과대학을 세워 운영하고 있는 상황과 최근의 유치원 사태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시사한다.

민간자본에 의해 설립된 의과대학과 병원에서 교수의 역할은 한낱 임상을 통한 수익창출 도구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오로지 수익창출 지향적 경영일념으로 일부 의과대학은 교수들의 최소 권익을 지키기 위한 단체인 교수(의)회도 제대로 가동시키지 못하게 하고 있고 교수의 전문직업성 개발을 위한 연구안식년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됐다고 한다.

의과대학 교수가 병원장이나 의료원장으로 임명되고 나면 임기 중에 병원 수익 증대를 자신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재단의 환심 사기에 바쁘고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리한 수익증대 추진으로 동료 의사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비난 받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실제로 비영리 대학병원에서는 수익증대를 위하여 한 푼의 급여 인상 없이 주말진료를 강요하기도 한다.

어떤 교수 출신 병원장은 교수의 대외 행동을 통제하여야 한다고 하며 환갑이 된 교수들도 평일 외부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8주 전에 미리 공가나 출장을 신청하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휴가일수를 사용하여 공적인 외부 일에 참가하도록 하여 교수사회의 원성을 사고 있다.

자신의 전문 분야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확장해 나가야 하는 전문가 그룹의 교수인지 일반 직원의 신분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대목이다.

이것은 병원장의 자신감 결여와 불안증이 만들어낸 결과로 보인다. 대학병원장의 리더십이 대학 본래의 사명인 교육과 연구 보다는 재단에 대한 충성을 핵심 목표로 삼는 것으로 비쳐 씁쓸하기까지 하다.

보다 큰 명분인 국민건강을 위한 사명감 같은 큰 그림을 찾아보는 것은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와 같다.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의 행정에는 구성원의 합의와 절충이 필요하다. 대학의 목표가 병원수입 증대라고 공공연히 이야기 하는 것은 교육연구 기관으로 왠지 천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회적 공익을 도모한다는 비영리 병원이 의료에 경영기법과 사업수완을 더하여 병원 수입을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무리한 꼼수를 등장시키고 환자 1인당 수익률이 극대화되도록 소위 가성비만을 고려한 창조적 의료를 쥐어 짜내도록 내몰고 있다.

적절한 견제 세력이 없는 대학병원의 보직은 쉽게 권력화하고 이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도 없어 교수들은 보직자의 임기가 다하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려 보는 방법을 택한다.

즉, 임상에 대한 허술한 관리체계 및 지배구조의 난맥상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셈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대학병원의 의료 역시 국제적 의료윤리의 규범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제의 식민지배기, 지배계층의 피지배분파에 있었던 의업이 그 뒤 한동안은 군사정권 아래 있다가 이제는 재벌이나 사학의 소유주에 의하여 지휘 감독을 받는 피지배분파의 신분으로 더욱 더 힘없고 초라한 모습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이제 임상수입원의 근간인 대학교수는 고급 생산직 직원의 일원이 된 셈이다. 교수에 대한 좋은 급여가 반드시 교수에 대한 존중은 아니다.

대학교수의 덕목은 자신이 알아서 자기 능력껏 자유로이 역량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적절한 직무의 독립성이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다.

전문가들의 역량은 교육 분야를 비롯하여 연구, 사회봉사,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어야 하며, 표출되도록 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임상교수에게 주어진 교수직에는 임상가를 넘어 연구와 교육 그리고 숭고한 사회적 봉사의 의무까지 포괄되어 부여되어 있다.

세계 최고의 연구중심대학에서 교수업적의 예시를 보면 학문의 자유와 교육을 필수로 교수들이 사회곳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도록 장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임상교수는 질병을 대상화하여 치료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문화는 교수 출신 병원장이나 의료원장이 전문직과 교수직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착각, 그리고 재단에 대한 과잉충성으로 학문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양새로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나라도 임상수입의 정도에 따라 교수 같은 전문직 사회의 우수성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일부 의과대학의 리더십을 보면 병원장은 자신을 병원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착각을 하고 교수의 규범과는 다른 원칙을 대학과 병원 운영에 적용하려고 유도한다.

그리고 보직이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권력의 결과, 착대(錯大)현상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교수에 대한 불필요한 통제와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에 적합하지 않은 일도 기획하고 개발하려 하는 행태를 낳는다.

착시는 익숙한 단어이다. 착시로 사용되는 착(錯)은 착각에도 자주 사용된다. 착대(錯大)는 본디 한자어로 우리 언어 체계에 들어와 흔히 사용되다가 중국식 발음이 변하여 ‘쪼다’가 되었다.

리더십이 착대 현상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머지 교수와 교수의회의 역할이다. 사람은 누구나 판단착오를 할 수 있다.

거대사업체인 병원, 의료원을 경영함에 있어서 의료와 대학에 대한 착각, 착시, 착대(쪼다)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변질된 리더십은 곧 나라 전체 의료가 왜곡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의과대학의 리더 선발이 정치성에 의한 착시, 착각으로 오염되어 있다.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의 리더 선발에 있어 재단의 권력 중심부에 하인처럼 접근하여 보직 쟁취자가 되고나면 중심권력 이상의 권력을 발휘하려는 우리사회의 저급한 문화가 녹아 있다.

의과대학과 대학병원 리더의 선발을 대학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사전 검증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은 한 나라 의료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요 모델임에 틀림없다.

의료계의 대학교수 출신 리더가 단기간의 경제적 성과에 집착하여 발생하는 착대(쪼다)나, 착시, 착각의 3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의료가 갖는 본래의 가치를 수호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이고 규범적인 목표를 만들어야 한다.

봉건체제의 재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3대 함정에 매몰된 사람이 리더십에 진입하는 것을 조심하고 포퓰리즘을 경계하여야 한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아시아 문화의 비판에서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자기의 권리 주장에 대해 취약하고 타인에 의한 권력의 침투를 쉽게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이 연합하여 단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일로 보인다. 이것은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나 교수 전문직의 사회적 하향 추락세인 근로계급화 현상(proletarianization)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향이자 발전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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