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심사평가원(원장 손명세)이 올해부터 ‘환자경험 평가’를 도입한다는 소식에 의사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실효성과 타당성, 신뢰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국가기관이 민간기관 및 민간인의 친절도를 평가하는 것은 월권이자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환자경험 평가 항목 예시
환자경험 평가 항목 예시

앞서 심평원은 의료소비자의 관점에서 의료의 질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올해 요양급여 적정성평가 신규 추진 항목에 ‘환자경험 평가’를 포함시켰다.

환자경험 평가는 의료서비스를 이용한 환자로부터 의료진과의 의사소통, 투약 및 치료과정 등 입원기간 중에 겪었던 경험을 확인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상급종합병원과 500병상 이상 종합병원에 입원했던 퇴원 8주 이내의 만 19세 이상 환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평가한다.

환자경험 평가도구(설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영역별 환자경험 19개 문항은 4점 척도(전혀 그렇지 않았다ㆍ그렇지 않았다ㆍ그랬다ㆍ항상 그랬다)로 구성돼 있다.

설문 문항은 ▲담당 의사는 귀하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대했습니까? ▲담당 의사는 귀하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 주었습니까? ▲귀하나 보호자가 담당 의사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자주 있었습니까? 등이다.

심평원은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해 요양기관별로 비교 가능한 환자경험 영역별 점수 산출하고, 평가대상 요양기관에 평가결과 및 비교정보를 제공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국가기관이 민간기관이나 민간인의 친절도를 평가해 공개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노 전 회장은 최근 의사포털에 남긴 글을 통해 “군대는 정부기관이지만 친절보다 생명보호가 먼저이기 때문에 친절도를 평가하지 않는다. 경찰도 정부기관이지만 범죄예방이 먼저이므로 친절도를 평가하지 않는다.”라며, “의료기관 역시 마찬가지다. 친절보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라고 강조했다.

노 전 회장은 “정부기관이 민간기관의 친절도를 평가한 사례는 더더욱 없다. 정부가 백화점이나 전국 주유소의 친절도를 평가해 공개한 사례가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국가기관이 민간기관 또는 민간인의 친절도를 평가해 공개하는 사례가 없는 이유는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사협회가 정부의 정책이나 국가기관의 행위에 대해 반발을 할 때는 대부분 명분과 우호적 여론이 필요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며, 국가기관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될 때는 명분이나 우호적 여론조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강력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 전 회장은 또, 심평원은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가적인 역할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이번 평가도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평가조정위원회에 참여하는 의료계 관계자도 환자경험 평가 주체의 적정성과 신뢰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3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심평원은 건강보험법상 요양급여에 대한 적정성 심사 및 평가업무를 하게 돼 있다.”라며, “암이나 항생제 적정성 등을 평가하는데, 환자경험 평가가 심평원의 업무로 적정한지 논란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우리나라 의료환경상 불가피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환자경험 평가를 한다고 베끼기만 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환자경험 평가 항목을 보면 의사가 친절했나, 설명은 잘 들었나, 시설은 깨끗했나 등의 내용이 있는데, 저수가 때문에 의료인력을 충분히 고용하지 못하고 입원환자들에게 최선의 진료를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의료제도의 모순이 있는데 외국에서 평가한다고 해서 우리도 무조건 환자경험 평가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경우 지불제도가 대부분 DRG 등 포괄형식으로 과소진료가 문제가 돼 환자경험 평가를 시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7개 질병을 제외하곤 행위별수가제이기 때문에 과소진료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상자가 되는 5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 환자라면 중증ㆍ고령환자일 가능성이 큰데, 24가지나 되는 긴 항목에 얼마나 신뢰도 있는 설문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라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환자경험 평가가 무조건 문제가 있다는게 아니라, 과연 심평원에서 하는게 맞는지, 우리나라 의료환경에 제도적 모순이 너무나 많은데 꼭 지금, 건보료로 전화설문을 해야 하는지, 우선순위가 맞느냐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라며, “그렇게 외국 제도를 많이 베껴오면서 왜 진료비 비교는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의사들의 환경은 장발장 수준인데, 요구하는 것은 성자라는 것은 너무 모순이 많다.”라고 비판했다.

민초 의사들도 심평원의 ‘환자경험 평가’ 도입 소식에 분개했다.

A 의사는 “예의는 쌍방이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환자들이 (의사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구는지 정부는 헤아려 보기나 했느냐.”라고 비판했다.

B 의사는 “의사는 민간인이고 의원은 민간 의료기관이다. 국가에서 민간 의료기관에 한 푼 지원도 않으면서 무슨 간섭이 이렇게 많은가.”라며, “친절하지 않은 병ㆍ의원이 있으면 안 가면 그만이지, 모든 의료기관이 친절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환자가 원하는 친절은 환자가 원하는대로 해 주는 건데, 그렇게 해줬다가 생기는 의료사고나 혼란, 분쟁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며, “의사 직종 외 음식점, 술집, 옷가게, 슈퍼 등 다른 민간 자영업자도 그렇게 해보라.”고 일침했다.

심평원 공무원도 의료인에게 친절도 평가를 받으라는 주장도 나왔다.

C 의사는 “이번 기회에 심평원 직원의 친절도를 의협이 회원들에게 조사ㆍ평가해서 월급 적정성에 반영하자.”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심평원은 환자경험 평가 결과 공개여부와 범위, 방법 등은 추후 의료평가조정위원회 심의를 통해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의 강한 반발로 제도 정착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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