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규제개혁의 일환으로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추진해 의료계와 한의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특히 의료계는 의약분업에 버금가는 사태라며 면허까지 반납할 기세로 들썩이고 있다. 의사협회를 비롯해 지역의사회와 전공의들, 의대생들까지 나서 성명서를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복지부와 한의계는 지난 2013년 헌법재판소 판결을 근거로 사용을 주장하지만, 당시 판결은 안압측정기 등 일부 기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불가로 결정한 다른 판례가 훨씬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의총이 지난 2012년 초 확보한 한의원 불법행위 영상. 한의원 간호조무사가 각각 (좌)초음파치료, (우)간섭파치료(ICT)를 하는 모습
▲전의총이 지난 2012년 초 확보한 한의원 불법행위 영상. 한의원 간호조무사가 각각 (좌)초음파치료, (우)간섭파치료(ICT)를 하는 모습

▽복지부, 상반기 내 유권해석 통해 한의사 의료기기 허용
앞서 국무조정실(실장 추경호)은 지난달 28일 경제단체 부단체장과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 차관이 참여하는 ‘규제기요틴 민관합동 회의’를 개최하고, 153건의 규제기요틴 과제 중 114건을 개선 추진하기로 했다.

‘규제기요틴’은 비효율적이거나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규제를 단기간에 대규모로 개선하는 규제개혁 방식을 뜻한다.

특히 보건의료 분야 중 보건복지부 소관의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및 보험적용 확대’ 과제는 대안 마련을 전제로 수용 과제에 포함됐다.

보건복지부는 “양ㆍ한방 이원화 체계의 특성과 국민의 요구, 헌법재판소 결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침을 마련하겠다.”라며, 상반기 내 기기별 유권해석을 통해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진단ㆍ검사기기를 명확화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12월 ▲보건위생상 위해를 가할 우려가 없고 ▲기기사용에 전문적 식견이 필요치 않고 ▲한의대의 의료기기 교육이 있는 경우 사용이 가능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면서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청력검사기 등은 한의사가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복지부도 이러한 헌재 판결을 기본 틀로 해 일부 현대의료기기에 대해 한의사들에게 사용을 허용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복지부는 한의약정책과를 중심으로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의료계의 반발을 우려하던 와중에 규제 기요틴 과제에 포함돼 추진 동력을 얻게 됐다.

실제로 복지부 한의약정책과 관계자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이 의료법에 저촉된다는 것은 의사협회의 입장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해 일반적인 제한기준이 없다는 것이다.”라며, “헌법재판소에서 중요한 판례가 나와 고민하는 와중에 중소기업중앙회의 건의로 이번 규제기요틴이 터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그 동안 법률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오히려 논란이 많았다.”라며, “판례가 쌓여 오고 결과적으로 처벌도 많이 받았다. 복지부가 내부적으로 유권해석 해준 것도 있었고 해서 종합적인 검토 후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醫 “의료제도 근간 흔들어” vs 韓 “의사들 직능 이기주의”
이 같은 소식에 의료계는 발칵 뒤집혔다. 한의사에게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이원화된 면허체계와 의료법을 훼손하는 처사이며, 국민건강 위해와 의료비 폭등까지 불러올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2월 31일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해 진단 및 처방을 내리는 것은 분명 의료법상 허용된 면허범위를 벗어난 위법한 의료행위로, 무면허 의료행위를 정부 스스로 허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보험 재정 낭비 등 악순환만 초래할 것이다.”라며,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의사와 한의사로 이원화된 면허체계 하에서 의료행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으므로 한의사가 의학적 원리에 근거한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의료일원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무진 의사협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규제기요틴은 국민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보건의료정책을 전문가와의 소통 없이 비전문가들이 정략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면서, 전면 투쟁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의사협회 비대위도 같은 날 성명을 통해 “정부는 의료계와는 학문적이고 발전적인 논의를 전혀 진행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도, 오로지 경제부처와 일부 원격추진 대기업들의 요구에 따라서 자신들이 만든 스케줄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면서, “오진의 위험성, 의료윤리적 문제, 3차 의료기관 환자 쏠림에 대한 우려, 환자정보 보안문제 등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치명적인 우려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서울시의사회와 부산시의사회, 대의원의장단ㆍ시군회장ㆍ집행부 연석회의에서도 비판이 쏟아졌고, 젊은 의사들과 미래 의료인인 의대생들도 분노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2일 성명을 통해 “규제기요틴은 의료체계에 되돌릴 수 없는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의료비용의 비효율적인 상승을 일으킬 것이다.”라며,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면허범위를 벗어난 의료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 의료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를 행정부의 유권해석만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법체계를 무시하며 혼란을 초래하는 발상이다.”라고 꼬집었다.

서울대병원과 이대목동병원, 아주대병원 전공의협의회, 대한의과대학ㆍ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도 각각 성명을 발표하며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하지만 한의계는 이러한 의료계 반응을 ‘직능 이기주의’로 치부하며, 한의사의 자유로운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통해 국민건강 증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지난달 30일 성명을 통해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이미 국민, 사법부, 국회 등이 지지하고 있는 사항이다.”라며,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안전성과 유효성에 문제가 없고 산업발전에 저해가 되지 않는 규제를 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규제기요틴’에도 가장 부합되는 내용이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2일에는 “해괴한 궤변과 억지 논리로 ‘절대 수용 불가’를 선언하며 면허증을 반납하겠다는 등 국민을 협박하는 대한의사협회의 행태를 강력히 규탄한다.”면서, 대한의사협회를 향해 국민 위에 군림하는 초국가적인, 초법적인 단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한의협은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국민을 위하여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국가적 소명이며,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는 사항이다.”라며, “언제쯤 지독한 직역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국민의 건강증진과 생명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의료인 단체로서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가.”라고 날을 세웠다.

이들은 “대한의사협회와 양의사들은 제3자로서 자기들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말라.”면서, “양의사들이 면허 반납과 파업 투쟁이라는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른다면 한의사들은 현대의료기기를 활용한 한층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한의진료서비스로 국민들의 건강지킴이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안압측정기 판결만이 ‘금과옥조’?
의료계는 복지부와 한의계가 헌재의 안압측정기 판결만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지만, 그 이후에 의료행위와 한방의료행위를 구분한 판결이 있다고 지적한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12월 27일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청력검사기 등은 측정결과가 자동으로 추출되는 기기들로, 신체에 아무런 위해를 발생시키지 않고, 측정결과를 한의사가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식견을 필요로 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건위생상 위해를 가할 우려가 없고 ▲기기사용에 전문적 식견이 필요치 않고 ▲한의대의 의료기기 교육이 있는 경우 한의사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4년 2월 13일 대법원은 IPL 관련 판결을 내리면서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제시한 바 있다.

대법원은 ▲관련 법령에 한의사의 당해 의료기기 등 사용을 금지하는 취지의 규정이 있는지 ▲당해 의료기기 등의 개발ㆍ제작 원리가 한의학의 학문적 원리에 기초한 것인지 ▲당해 의료기기 등을 사용하는 의료행위가 한의학의 이론이나 원리의 응용 또는 적용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당해 의료기기 등의 사용에 서양의학에 관한 전문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아 한의사가 이를 사용하더라도 보건위생상 위해가 생길 우려가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당시 대법원은 IPL이 적외선이나 레이저 침을 이용해 경락에 자극을 줘서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적외선치료기나 레이저 침 치료기와 작용원리가 같다고 보거나, IPL을 사용한 피부질환 치료가 빛을 이용해 경락의 울체를 해소하고 온통경락을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한의사들은 사용이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용한 IPL의 개발 및 제작 원리가 한의학의 이론이나 원리에 기초했는지 심리했어야 했고, 토대로 한의사의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했어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IPL 판결 뿐 아니라, 앞선 법정 공방에서 초음파, 엑스레이, CT 모두 한의사가 패소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 ‘2011헌바398’ 판결에 따르면, “영상의학과는 초음파진단기기와 같은 첨단의료장비를 이용해 영상을 획득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법상 서양의학의 전형적인 전문 진료과목이다.”라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초음파검사는 시행은 간단하나 영상을 평가하는 데는 인체 및 영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함은 물론, 검사 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므로 영상의학과 의사나 초음파검사 경험이 많은 해당과의 전문의사가 시행해야 하고, 이론적 기초와 의료기술이 다른 한의사에게 이를 허용하기는 어렵다.”라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 ‘2010헌마109’ 판례에서도 “한의사가 초음파 진단기를 사용해 치료행위를 한 것은 ▲한의학적 지식이나 방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을 기초로 한 점 ▲초음파검사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진료과목 및 전문의 영역인 영상의학과의 업무영역에 포함되는 점 ▲초음파 진단기를 통해 얻어진 정보를 기초로 진단을 내리는 것은 영상의학과 전문의 등 의사의 업무영역에 속하는 점 등에서 볼 때 한의사에게 면허된 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전했다.

서울행정법원 6부 역시 지난 2013년 1월 24일 “한의사가 초음파골밀도측정기를 이용해 성장판 검사를 하는 것은 한방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며, 의료법과 한의학의 이론적 기초, 진단방법을 기준으로 볼 때 한의사의 초음파골밀도측정기 사용은 불법 의료행위에 해당된다고 판결했다.

이외에도 한의사가 엑스레이를 이용한 골밀도 측정기로 환자의 성장판 상태를 검사하고 뇌파검사기를 사용하는 것과 CT기기를 촬영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법으로 판결난 바 있다.

결국 이 같은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하고 복지부가 헌재의 안압측정기 판결만을 기준으로 유권해석을 내려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 범위를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건당국의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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