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직에 도전하는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의료계와 한의계가 들썩이고 있다. 두 직역의 가장 예민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의료기기’ 사용과 관련한 발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가 ‘주객이 전도됐다’고 운운해 의사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출마한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한의사협회 정기총회에 참석해 전한 축사로 인해 홈페이지에 비판글이 쇄도하자 해명의 뜻을 전했지만, 석연치 않은 내용으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한의사협회에서 어떤 말 했길래...

▲이혜훈 최고위원(사진=이 최고위원 홈페이지)
▲이혜훈 최고위원(사진=이 최고위원 홈페이지)

이혜훈 최고위원은 지난 23일 대한한의사협회가 협회회관에서 개최한 제59회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축사를 통해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며, “우리나라 전통의료인 한의학이 주인 역할을 해야 함에도 많은 게 바뀌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최고위원은 “최근 헌법재판소 판결로 법적 시비는 없어졌지만, 장벽이 없어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의료기기도 써라, 말라 하는데 의료현장에서 이 같은 장벽이 없어질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이 문제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라고도 했다.

이 최고위원은 건강보험 재정에서 한의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4% 밖에 안 되는 사실을 거론하며, “이 또한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실 한의원을 많이 이용하는 편인데, 한방의 경우 건강보험 급여가 되지 않는 게 많다.”라며, “자주 이용하다 보니 왜 내가 다 부담해야 하나 억울할 때가 많았다. 앞으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라고 역설했다.

특히 이 최고위원은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며 발표한 ▲한방의료타운 조성 ▲박람회 개최 ▲해외환자 중개 ▲메디텔 확충 등 한의계 관련 공약을 소개하며 한의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의료계 발끈…노환규 회장 ‘첫’ 비판글
이 최고위원의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의료계는 발칵 뒤집혔다. 특히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은 이 최고위원의 홈페이지에 가장 먼저 항의글을 남겨 눈길을 끌었다.

노환규 회장은 “漢의학이 韓의학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86년의 일입니다.”라는 짧은 지적 뒤에 이 최고위원의 기사를 인용했다.

이 최고위원이 한의학은 우리나라 전통의료이며 주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한의학은 중국에서 유래됐으며, 한자 표기가 바뀐 것도 불과 30여년 전이라는 사실을 꼬집은 것이다.

서울시의사회 역시 지난 24일 성명을 통해 “이 최고위원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탈락 급행 열차에 탑승하려고 하느냐.”라며, 해당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서울시의사회는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불법 사용과 관련된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X-ray, CT, 초음파, 레이저 등 현대 의료기기는 현대 의학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산물이며 완전히 다른 학문 체계를 가진 한의학을 배운 한의사들이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서울시의사회는 “의료계 민심이 몹시 들끓고 있다.”라며, “이 최고위원이 한방 건강보험 급여 확대를 언급했다는데,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울시장 후보로서의 자격이 의심될 정도다.”라고 비판했다.

건강보험 급여 확대는 어디까지나 국민적 요구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며, 정당한 급여화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인데, 표심에 눈이 어두워 실현 가능성이 불분명한 정치적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시의사회는 “주객전도 발언 등 이치에 맞지 않는 언사로 국민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서울시의사회 3만여 회원들의 심기를 어지럽힘으로써 향후 선거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노환규 회장이 이혜훈 최고위원 홈페이지에 남긴 글
▲노환규 회장이 이혜훈 최고위원 홈페이지에 남긴 글

▽이혜훈 최고위원 홈피는 ‘초토화’
민초의사들도 단단히 뿔이 났다. 이혜훈 최고위원의 홈페이지에는 24일 하루에만 300여개가 넘는 글이 올라왔으며, 이날 오후 접속자가 몰려 트래픽 초과로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다.

의사들은 의료계와 한의계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현대의료기기 사용 문제와 관련, 판례와 현행법 등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을 편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또한 ‘주객이 전도됐다’는 발언 역시 경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 의사는 “한방 측이 헌재에서 합헌이라고 판정 받은 건 안압측정기 정도이며, 초음파와 방사선은 한의사가 사용 불가능한 의료기기다.”라며, “제대로 알고나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의사는 “의사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면서, 전국의 의사들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다른 의사는 “서울 교통은 주객이 전도돼 차량들이 다닌다. 이제는 마차들이 많이 다니도록 해야 한다.”라며, 이 최고위원의 ‘주객 전도’ 발언을 비꼬기도 했다.

또 다른 의사는 “이렇게 굳게 믿고 있으면서 막상 해마다 건강검진 받고, 암 걸리면 병원 가서 수술 받고 다치면 응급실 가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냥 단골 한의원에서 모든 걸 해결하도록 하고 싶다.”라고 비판했다.

의사들과는 달리 한의사들은 이 최고위원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소신 있는 발언을 지지한다’라며 응원의 글을 이어갔다.

특히 의사들을 향해 “의료기기를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착각하지 말라.”고 일침하는가 하면, “자신의 밥그릇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지 말고, 의학의 근본취지를 잊지 말아라. 한의사 진단기기 허가는 전 세계적으로 무궁무진한 의학 발전의 초석이 될 것이며, 국민들도 기뻐할 것이다.”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혜훈 최고위원 측 “일부 언론 왜곡보도” 해명
의사회에서 비판 성명이 발표되고, 홈페이지에 비난글이 쇄도하는 등 논란이 커지자 이혜훈 최고위원 측은 24일 홈페이지 내 게시판에 해명글을 올렸다.

이 최고위원은 “대한한의사협회 정기총회 축사 중, 일부 내용이 왜곡돼 전달돼 심려를 끼쳤다.”라면서도, “일부 언론이 왜곡 보도했다.”라고 억울해 했다.

또한 이 최고위원은 “한의학계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해 제가 드린 말씀의 본 뜻은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법 개정이 이뤄졌음에도 현장에서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장벽을 없애도록 여야가 힘을 합쳐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를 일부 언론이 왜곡해, 마치 한의사에게 모든 의료기기를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도했다는 지적이다.

이 최고위원은 “이는 사실이 아님을 밝힌다.”면서, “제 본 뜻에 오해가 없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자신이 오해의 소지를 살 만한 발언을 하고도 이를 교묘히 언론 보도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됐다.

특히 의사들을 가장 분노하게 했던 ‘주객이 전도됐다’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제대로 해명하지 않아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과거 국회의원 발언 살펴보니...
한편, 이 같은 정치인의 선심성 발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는 표를 얻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니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도 많지만, 연중행사처럼 반복되는 일에 의사들의 심기는 불편하다.

지난해 10월 14일 국감에서는 새누리당 김명연 의원이 “법에서 장려하고 있는 한의학인데 왜 한의사가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없느냐. 국민이 양방, 한방, 대체의학 중 어느 부분을 선호할지 모르는 만큼, 국민건강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해 줘야 한다.”라고 주장해 의사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당시 김 의원은 “인간의 오감에만 의존하라는 고등법원의 판결이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국가의 경쟁력, 의료계의 경쟁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어떤 단체의 눈치를 보느라 개정을 못한다면 되겠느냐?”라고도 말했다.

특히 김 의원은 공항 검색대에서도 엑스레이를 사용하는데 한의사는 못 쓰고 있으며, 가축 임신 진단 등에도 초음파 등 현대의료기기가 사용되는 상황이라고 예를 들며, 국가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접근해 달라고 요구했다.

민주당 이목희 의원 역시 국감 배포자료를 통해 “한의학의 현대화ㆍ과학화와 환자 보호를 위해 한의사들이 안전성이 확보된 저용량 엑스레이나 초음파검사기 정도는 빠른 진찰과 의학적 판단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2012년 2월 19일 열린 ‘전국한의사대회’에서 당시 민주통합당 김성순 의원은 자신이 16대 국회 때 한의약육성법을 제정한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아직도 법적 뒷받침이 미미한데 한의학을 미래 전략 핵심사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역시 “한의학 종사자들에게는 과학적 응용이 차단돼 있어 날개가 꺾였었지만 이제는 작은 어구 하나로 그 길이 열렸다.”며, 자신이 한의약육성법 개정 당시 ‘시대발전에 맞추어’라는 애매한 문구 대신 ‘과학적’이라는 세 글자를 삽입했다고 강조했다.

추 의원은 이로써 한의사들의 염원인 첨단 진단기기를 활용할 수 있게끔 하는 근거를 열어놨다고 강조하며, 자신 역시 지속적인 다리역할을 약속하겠다고 전했다.

새누리당 정하균 의원도 “전통의학은 고리타분한 방식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직도 첨단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면서, “앞으로도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차근차근 해나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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