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가 마주 앉아 한 달여 동안 진행해 온 의-정협상이 끝났다. 일부 언론과 회원들 사이에서 의사협회가 사실상 ‘패배’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내주지 말았어야 할 원격의료를 내준 채 뚜렷한 성과 없이 협상을 끝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협회는 원격의료 허용과 관련 어떠한 합의도 하지 않았다.
의료발전협의회가 내놓은 원격의료 관련 협의 결과를 들여다 보자. 공동기자회견에서 양측은 이날 배포한 협의결과 문서에 원격의료와 관련한 입장차이를 명시했다.
원격진료 및 처방에 대해 의사협회의 경우 시범사업을 통해 타당성을 검토한 후 법안이 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정부는 법률 개정 후 법률에 근거해 시범사업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며 입장차이를 분명히 밝혔다.
단지 의료인 간 원격의료 활성화와, 대면진료를 대체하지 않는 의사-환자 간 원격모니터링 및 원격상담에 대해 필요성을 인정한다는데 동의했을 뿐이다.
양측은 이러한 협의 내용을 존중하면서 원격의료 개정법안에 대해 국회 논의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차이를 논의하기로 했다고 선을 그었다.
이를 두고 의사협회가 정부와 함께 원격의료의 입법화를 동의했다거나, 원격의료에 사실상 합의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원격의료 국회 논의 합의가 원격의료 합의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자 노환규 회장은 당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원격의료 합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노환규 회장은 “협의과정에서 양측의 입장 차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라면서 “원격진료, 투자활성화대책에 대해 의사협회의 반대입장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다음날 임수흠 협상단장도 기자회견을 자청해 노환규 회장과 같은 입장이라며, 원격의료를 합의해 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의사협회에 따르면 양측 협상단은 3차 회의에서 원격의료에 대한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는 이후 회의에서는 더이상 논의하지 않았다. 협상초기부터 협상이 결렬되지 않고 진행될 경우 원격의료는 국회에서 논의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원격의료 국회행은 예정된 수순
그렇다면 의사협회 협상단은 원격의료 관련 법안의 국회 제출을 저지하는 게 목표였을까?
양측이 협상에 나서기로 결정하면서 국무회의 상정 및 국회 제출은 예정된 수순으로 판단된다.
의사협회가 1월 11일부터 12일까지 무박이일로 진행한 총파업출정식에서 3월 3일 총파업 시작일을 예고하는 배수진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복지부는 곧바로 의료계의 원격의료 철회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권덕철 보건의료정책관은 1월 13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원격의료에 대해 “의-정협의를 통해 논의된 내용들을 국회입법과정에서 충분히 보완하면 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복지부의 이 같은 입장은 나흘 뒤 재차 확인된다. 양측 협상단은 1월 17일 사전 준비모임을 갖고 협상단 모임의 명칭과 회의 일정을 정했다.
준비 모임이 끝난 후 성창현 복지부 일차의료개선팀장은 의사협회가 협상을 끝내기 전까지 원격의료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는 것을 유보에 달라고 제안한 사항에 대해 “복지부가 결정할 사항이다. 협의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의사협회 협상단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이용진 협상단 간사는 “원격의료법안의 국무회의 상정 유보는 요청사항이지, 협상의 전제 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리하자면 복지부는 협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원격의료법안의 국회행을 기정사실화했고, 의사협회 협상단이 이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부에서는 협상을 깨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협상을 깬다고 해서 뚜렷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협상단을 복지부와 마주 앉게 한 것은 총파업출정식에 참석한 의사대표자들이었다.
임수흠 협상단장이 언급했듯이 회원들을 위해 밥상을 키우는 일이 협상단에겐 최선이었다.
▽협상단은 어떤 밥상 차려 놨나
노환규 회장이 원격의료에 대한 의사협회의 반대 입장은 협상 전과 조금의 변화도 없다고 거듭 밝혔고, 임수흠 협상단장도 이를 확인해 줌으로써 원격의료 합의 논란은 잠잠해지는 분위기이다.
이제 협상단이 차린 밥상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용진 협상단 간사는 이번 협상의 가장 큰 성과로 복지부가 의사들의 전문성과 현장의 중요성을 존중하기로 약속한 점을 꼽았다.
복지부는 의료제도 개선에 앞서 의료단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시범사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제도 설계 단계에서 시범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실제로 의사협회는 그동안 수차례 의사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달라고 촉구해 왔다.
의료기관 기능재정립과 의료전달체계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협상결과를 얻었다는 게 이용진 간사의 설명이다.
정부와 의료계가 ‘의원은 외래, 병원은 입원’이라는 원칙 아래 의료기관의 역할과 기능을 정립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를 이행하기 위한 방안으로 복지부는 진료의뢰 및 회송 강화, 상급병원의 경증환자 이용 축소를 위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용진 간사는 협의 결과 문서에 넣지는 않았지만 진료의뢰ㆍ회송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병원에서 의원으로 환자를 회송할 경우 회송료를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또, 상급종합병원의 외래 환자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는 경우, 상급종합병원 지정을 취소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고 언급했다.
양측은 건강보험의 의사결정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도 합의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 구조개선에 대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했고, 수가결정 과정에서 협상 결렬로 건정심에서 수가를 결정하는 경우, 가입자 및 공급자 등이 함께 참여하는 중립적 조정소위원회 구성 등 합리적 개선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건정심 구조개선과 조정소위원회 구성 역시 의사협회에서 수차례 제기해 온 요구사항이었다.
▽제도개선 이행 가능성 얼마나 있나
임수흠 협상단장이 수차례 밥상이라는 표현을 한 만큼 밥상에 비유해 보자. 협상단은 그동안 의사협회가 요구해 온 다수 의제를 올려 놓은 밥상을 준비했다.
하지만 반찬은 단순히 종류만 많다고 해서 먹는 이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다. 음식 자체에도 적당한 간이 배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먹는 이의 식성과도 맞아 떨어져야 만족을 줄 수 있다.
지나친 비약일 지 모르지만 협상단이 차려놓은 밥상은 의사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선택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반찬에 간이 제대로 배어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협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과 시기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노환규 회장은 “정부측 입장은 기한도 없고 내용도 모호한 약속어음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협의결과 문서를 보면 ‘상호 노력하기로 함’, ‘논의 결과를 존중하기로 함’, ‘일차의료협의회를 상시화하기로 함’,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시행함’, ‘깊이 공감함’, ‘방안을 강구하기로 함’ 등 모호한 표현 일색이다.
임수흠 협상단장은 19일 기자회견에서 복지부가 내용과 시기를 약속한 사안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진의 신고제도 심평원 일원화’,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 신고제도 일원화’, ‘자율시정 통보제도 및 지표연동관리제 통합’ 등이 올해 상반기 중으로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의료급여 미지급금에 대한 이자 지급’의 경우, 급여지급 기일을 명시하고 이를 초과할 경우 연체이자를 지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임수흠 단장은 나열한 사안들이 지난해 일차의료살리기협의체에서부터 논의된 규제개선 과제라는 지적을 받자, 협의가 중단된 상태에서 의발협 의제로 포함시켜 이루어낸 성과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의발협 공동기자회견에서 공개한 협의결과 문서에는 규제개선 과제에 대해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시행한다고만 명시해 온도 차가 있다.
무엇보다 의발협 협의결과 문서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기한이 명시된 안건이 없다.
이에 대해 협상단은 일회성 수가 인상이 아니라 수가결정구조 개선 등 의료제도 및 구조를 개선하는 논의를 해온 만큼 큰 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투쟁 or 협상, 선택은 의사회원의 몫
임수흠 단장은 협상과정에서 의료현장의 문제점을 전달했고, 정부가 원격진료와 투자활성화를 주장하는 속내를 듣고 접근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원격의료와 투자활성화에 대해서는 접근성을 찾지 못했고, 의료제도 개선과 건보제도 개선에 대해서는 접근성을 찾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협상단은 대다수 아젠다를 복지부가 구체화하기 위한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약속한 만큼 성과를 거뒀다는 입장이다.
복지부가 일차의료 살리기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고, 국회도 저수가ㆍ저부담ㆍ저급여를 인정하고 있는 만큼 논의 과정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과는 별개로 협상단은 최종 선택은 의사회원의 몫이라고 분명히 했다.
임수흠 단장은 회원 투표에서 협상안을 거부하면 3월 10일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고, 협상안을 받아들인다면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유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협상안을 받아들인다면 복지부의 제도 개선 여부를 모니터하되, 이행되지 않는다면 유보했던 파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원 투표는 당초 일정에서 이틀 미뤄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8일간 진행된다. 의사협회는 투표가 연기된 이틀 동안 회원들에게 현재 상황을 적극 홍보한다는 계획이다.
의사협회는 총파업 돌입 날짜를 3월 10일로 확정했다. 투표는 3월 10일 총파업 돌입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총파업 기한은 시도의사회와 논의해 투표 종료일 이전에 결정하기로 했다.
의사협회는 투표 기간 동안 매일 투표 진행상황을 공개할 예정이다. 특히 지역의사회를 구분해 투표율을 공개할 방침이어서 시도의사회장의 리더십을 간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노환규 회장의 거취를 묻는 투표는 총파업 투표와 병행하지 않기로 했다.
노 회장은 “총파업 결정을 위한 투표에 저의 신임을 묻는 투표를 병행할 지 여부를 논의했으나 또 다른 혼란이 초래된다는 우려로 인해 투표 종결 이후 거취를 결정짓기로 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