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이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이끄는 동반성장포럼의 강연자로 나서 대형병원과 동네의원 간 무한경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동반성장포럼은 더불어 사는 사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사회, 민주적 가치가 구현되는 사회를 핵심가치로 내세운 연구모임으로 그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업종 간, 세대 간, 지역 간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반성장 방안을 제시해 왔다. 10일 팔래스호텔에서 열린 6차 포럼에서 노환규 회장이 지적한 국내 의료계의 문제점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정리해 봤다.

▽의료기관 양극화ㆍ불공정 경쟁 심각한 수준
의료기관은 규모와 역할에 따라 의원, 병원, 종합병원, 상급종합병원으로 나뉘지만 병원과 종합병원, 상급종합병원을 병원으로 통칭한다.

현재 국내에는 약 2만 8,000개의 동네의원과 약 2,500개의 병원, 280여개의 종합병원, 44개의 상급종합병원이 있다.

연간 건강보험료의 지출현황을 보면 지난 2002년 의료기관 분류에서 병원과 의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50.69%와 49.31%로 비슷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져 2012년에는 67.69%와 32.31%를 기록했다. 이러한 매출 격차는 동네의원들의 경영난을 초래했고, 해가 갈수록 동네의원들의 폐업은 늘어나고 있다.

의료기관 양극화 현상은 상급의료기관에 이르면 더 심해진다. 3만 여개에 이르는 전체 의료기관 중에서 44개에 불과한 상급종합병원에 지급되는 비용이 전체의 22%에 달한다.

그러나 이 44개의 상급의료기관 중에서도 빅5라 불리는 5대 대형병원(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으로의 집중화 현상은 더 심각하다.

44개 상급의료기관의 매출 중 5개 의료기관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무려 35%에 이른다.

이들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은 매출뿐만이 아니다. 5개 상급의료기관이 한해 수 천명씩 간호사를 채용해 대기간호사로 1년씩 기다리게 하는 동안 중소병원은 간호사를 채용하지 못해 80%의 병원들이 기준에 못미치는 간호인력등급을 받고 있다.

의사인력 역시 흉부외과의 경우 전국 25명의 전공의 중 15명이 5개 병원으로 몰린다. 또, 매년 배출되는 신규 전문의 중 30%가 넘는 인력이 5개 병원으로 가고 있다.

▽대형병원 집중 현상 피해자는 누구인가
대형병원 집중 현상이 초래하는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동네의원(일차의료기관)의 붕괴를 가져온다. 현재 환자에 대한 일차진료, 즉 게이트키퍼(Gate Keeper) 역할을 담당하는 동네의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있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있는 동네의원들도 자신의 전문진료과목을 지키기보다 미용성형 분야로 전문과목을 바꾸고 있는 실정이다.

또, 중소병원과 지방병원도 동네의원과 마찬가지로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서울에 모여있는 빅5 병원은 전국에서 행해지는 암 수술의 50%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이식수술의 경우 빅5 병원이 70%를 담당할 정도로 쏠림현상이 심각하다. 경영수지의 유지와 인력공급에 있어 심각한 압박을 받는 중소병원들과 지방병원들은 점차 도태되고 있다.

동네의원과 중소병원의 위기는 의료접근성의 저하 및 의료의 질 저하를 불러온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경영개선이 어려운 실정에 놓인 동네의원과 중소병원, 그리고 지방병원들은 비정상적인 경영수지 개선 방법을 찾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의료의 왜곡을 초래한다.

응급환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환자실과 응급실 등이 폐쇄되고, 각종 편법과 불법시술이 늘어나는 것이다.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쏠림으로 인해 중소병원과 의원의 환자가 줄어들게 되면 의료의 질이 떨어지고, 이는 다시 작은 병ㆍ의원에 대한 환자의 불신으로 이어져 환자가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의료기관 무한경쟁 원인은 잘못 설계된 제도
그렇다면 대형병원집중 현상과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잘못 설계된 건강보험제도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정부는 1977년 의료보험제도를 시작할 때부터 의료수가를 원가보다 낮게 책정했으며, 진료수가는 현재도 원가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또한 의료수가의 원가보전율은 중증질환에 대해 더 심각해 중환자실과 응급실의 겨우 50%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이러한 낮은 의료수가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비보험진료,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등으로 수익을 만들어야 하고, 시간당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박리다매가 가능해야 한다.

동네의원에서는 경증환자에 대한 외래진료가 중심이 돼야 하고, 병원에서는 중증환자에 대한 입원치료가 중심이 돼야 한다. 하지만 국내 건강보험제도 하에서는 대형병원에서 외래진료를 많이 볼수록 이익이 발생하고 중증질환을 많이 볼수록 손실이 발생한다.

복지부가 2009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상급종합병원의 외래다빈도 상병 상위 5개 질환에 고혈압과 당뇨, 감기가 포함돼 있을 정도로 의료전달체계가 왜곡돼 있다.

의료기관이 무한경쟁을 하게 된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선택진료비 허용, 차등수가제 차별 적용, 병상총량제 및 의료전달체계 강화정책 도입 거부 등 정부의 정책적 실수를 꼽을 수 있다.

선택진료비 문제를 보자. 정부는 원가 이하의 낮은 의료수가 체제에서 병원의 생존을 위해 선택진료비를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이는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해 고스란히 환자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국민이 건강할 때는 낮은 보험료 때문에 만족하지만 중증질환이 발생하면 환자의 본인부담이 커 재정파탄에 빠지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차등수가제는 동네의원에서 한 명의 의사가 하루에 75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는 경우 진료비를 순차적으로 90%, 75%, 50%만 지급하는 제도이다.

차등수가제는 의사가 지나치게 많은 환자를 진료하면 의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가정하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동네의원에만 적용되고 있어 병원과의 형평성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병상총량제의 경우 개발도상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의료공급과잉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병상을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의료기관이 무한경쟁을 벌이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국민의 선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면서 재래시장보다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국민의 기호는 의료시장에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값싼 저가의료를 제공하는 의원보다 값비싼 의료를 제공하는 병원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경향이 뚜렷해 졌다.

▽의료계 동반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현재 의료기관은 질적인 경쟁보다 양적인 경쟁과 과잉투자로 출혈 경영을 하고 있다. 대형병원은 의료수요를 감안하지 않고 병상을 무분별하게 확장하고 고가의 의료장비를 들여옴으로써 규모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양적 팽창은 경제난 때문에 의료이용률이 줄어들자 병원에 또 다른 경영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영 손실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형병원들이 중소병원이나 의원과의 상생을 고려할 리는 없다.

결국 해결책은 근본적인 제도개선뿐이다.

건강보험료를 적정수준으로 인상하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는 방안을고려해야 한다. 낮은 건강보험료는 낮은 의료수가와 낮은 보장률을 낳고, 이런 제도는 병ㆍ의원으로 하여금 박리다매 경영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도록 압박해 동반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반면 국민은 낮은 보장률로 인해 민간의료보험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이 때문에 높은 건강보험료의 이중부담을 지게 된다.

현행 건강보험료를 상향 조정함으로써 OECD 국가 중 낙제 수준인 보장률을 높여야 규모의 경쟁이 아닌 질적 경쟁이 이뤄질 수 있다.

선택진료비는 현재 국민의 가장 큰 의료비 부담의 원인이므로, 이를 급여화 시켜야 하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의원급에도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

아울러 경증환자의 진료를 억제하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행위별수가의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 중증질환치료에 대한 의료수가가 턱없이 낮고 외래진료는 많이 볼수록 이윤이 발생하는 구조로 돼 있어 대형병원 중증질환에 대한 보험치료를 기피하고 외래진료를 늘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병원이 의원과의 경쟁에 매달리지 않도록 중증질환 치료비를 대폭 상향조정하고 단순 경증환자에 대한 외래진료비는 하향조정하는 방안이 요구된다.

병원급 의료기관의 외래진료 억제책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 일본에서는 전체 병원 매출 중 외래진료매출 비율을 일정수준 이하로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과 외래진료환자 중 타 기관 전원환자 비율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을 도입해 대형병원들이 경증환자의 외래진료를 놓고 중소병원 및 의원과의 경쟁을 방지하고 있다.

특히 상급종합병원이 연구와 교육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노환규 회장 “의료계 불공정 경쟁 피해자는 국민”
노환규 의사협회장은 이번 강연에서 의료계의 양극화와 불공정한 경쟁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노환규 회장
▲노환규 회장
특히 타 산업의 경우 불공정한 경쟁은 피해자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지만, 의료 분야의 불공정한 경쟁은 당사자에게만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다수 피해자, 즉 국민의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막대하다고 주장했다.

노 회장은 “의료 분야의 불공정 경쟁이 지속되면 의원과 중소병원이 문을 닫게 되고, 이는 의료 접근성 저하와 의료전달체계 붕괴를 불러옴으로써 결국 의료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라고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점이다.”라고 우려했다.

그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고, 의료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정운찬 이사장
▲정운찬 이사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지난 2012년 6월 19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했다.

독점이 지배하고 기회가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미래를 위한 지속 성장의 동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동반성장연구소는 올해 5월부터 매월 둘째주 목요일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정치 등 각 분야별로 불균형을 진단하고 동반성장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반성장포럼을 열었다.

동반성장포럼은 지난 5월 9일 동반성장과 경제민주화의 이해와 오해를 시작으로, 동반성장 활성화를 위한 갑을문화 개선(6월 12일), 교육과 동반성장(7월 11일), 통일시대를 위한 남북 동반성장(8월 8일), 미래를 위한 지역간 동반성장(9월 12일) 등을 주제로 개최됐다.

 

저작권자 © 헬스포커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