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을 돌이켜보면 의사는 청진기와 몇 가지 간단한 도구로 환자를 진찰했고 심지어 수술을 할 때도 그다지 복잡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에테르 적신 가제를 환자 코에 얹어 마취를 하고 상태를 보아가며 필요한 시술을 했다. 약도 그리 비싸지 않았으니 의료에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약을 만들고, 의료기 회사들이 값비싼 의료기기를 만들며, 병원에는 수많은 직종들이 근무한다.

의료와 관련된 모든 직종은 모두 ‘의료 산업(healthcare industry)’이 되었다. 이 산업들은 자본이 투입되고 이윤을 추구한다. 그러나 오로지 이 중에서 의사만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돈을 밝히거나 이윤을 추구하면 안 된다고 한다.

백년 전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값비싼 시약을 사고, 진단기기를 사고, 수술 기계를 사지 않으면 의료는 시술이 불가능하다.

그런 돈은 어디선가 나와야 한다. 환자 본인이 내든지, 환자가 평소에 보험료를 낸 돈으로 보험회사가 부담을 하든지, 공공 영역이 부담을 하든지, 국가가 부담을 해야 한다.

‘돈보다 생명’이 아니다. 돈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돈보다 생명이라는 주장은 의사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제약회사 앞에서, 의료기회사 앞에서, 수많은 직종을 거느리고 그들에게도 매년 임금을 올려주어야 하는 병원 경영자 앞에서 해야 할 이야기다.

아니면, 국민의 건강을 책임진다고 하는 국가 앞에서 해야 한다. 의사는 그저 환자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필요한 조치를 취할 뿐이다.

그러나 환자에게 최선은 보험회사나 보험공단이나 국가에게는 최선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의사가 그 사이에 끼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의사는 최선을 다하고, 진료비는 환자 본인과 보험자, 또는 국가 사이에서 해결하면 된다.

행위별수가제든, 포괄수가제든 모든 제3자 지불제도의 함정은 그러한 갈등을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보험의 예를 들어보자. 대체 어떤 경우에 사고가 난 차주와 공업사가 갈등을 빚는가? 차주는 차를 맡기고 공업사는 필요한 견적을 내고 수리를 하고 해당 비용을 보험사로부터 받는다. 그 비용이 터무니없다면 공업사는 해당 차량의 수리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상식적인 일이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보험수가가 터무니없이 작다면 그걸로는 도저히 수리를 못 하겠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의료의 경우에는 이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물론 사고 난 차량과 사람의 몸은 다르다. 차는 수리를 안 해 줄 수도 있지만 아픈 사람은 어떻게든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자동차보험회사들은 지금도 연 수천억 원 이상의 적자를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업사에 지불해야 하는 차량의 수리비를 깎거나 인상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하물며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진다고 이러한 ‘강제보험 제도’를 만들어 놓았으면 적자가 나는 경우 그 부담도 떠안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왜 의사들에게 떠넘기는가?

의사들은 그러한 부담을 온전히 떠안아야 하지만, 그 부담을 의료기회사나 각종 시약을 만드는 제약회사, 의사에게 대출해준 금융기관들도 함께 떠안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의사들은 건물주와 금융기관과 인테리어업자와 의료기기상과 직원들에게는 모두 돈을 벌게 해 주면서 자기 실속은 챙기지도 못한다. 제도가 그것을 원칙적으로 막고 있는데 걸핏하면 “사람 목숨보다 돈만 밝히는 놈들”이라는 부당한 비난까지 듣는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부도를 내고 모든 손해를 건물주와 금융기관과 인테리어 업자와 의료기기상에 나누어 떠넘기기보다 자기 목숨을 끊는 편을 택한다.

편의점주가 같은 경영상의 이유로 자살하면 언론에 나오지만, 의사는 잘 나오지도 않는다. 편의점주의 자살이 대기업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주장한다면, 의사의 자살 역시 ‘사회적 타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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