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약 보험급여 시범사업을 사이에 둔 한의사와 약사의 다툼이 심상치 않다. 한의협과 약사회는 연일 상대방을 비판하는 성명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고 있다. 더구나 한의계는 해당 시범사업과 관련해 집행부와 평한의사들간의 내홍까지 심화되는 등 설상가상의 상황이다.

▽첩약 급여 시범사업, 한약조제약사가 뭐길래?
앞서 지난달 25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는 국민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계획의 일환으로 내년 10월부터 3년간 노인ㆍ여성질환 치료용 한방첩약에 대해 시범적으로 첩약의료보험사업을 실시하기로 하고, 시범사업에 한약조제약사와 한약사를 포함시키는 안을 결의했다.

세부 추진방안 등은 향후 결정할 예정이며, 대표상병에 해당하는 일부 100처방은 이해 관계자 협의 결과에 따라 선별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건정심의 이번 결정으로 연간 약 2,000억원 규모의 재정이 투입되며, 3년간 한시적으로 시범사업을 실시한 후, 그 결과를 모니터링 해 추후 확대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다.

문제가 된 ‘한약조제약사’는 한약조제시험을 통과한 약사로 한약분쟁 이후 전국적으로 2만 5,000명 정도가 배출됐으며, 이들은 국가가 지정한 100가지 처방 내에서 가감없이 조제할 수 있으나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되지 않은 상태이다.

먼저 한의계 내부 분열은 대한한의사협회(이하 한의협ㆍ회장 김정곤)가 건정심 결정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하며 시작됐다.

김정곤 회장은 “지금까지 첩약을 건강보험 급여화 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많았으나, 현재 전혀 급여로 인정되지 않고 있어 한방의료에 대한 접근성과 활용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건정심의 이번 결정으로 국민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양질의 한방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부 한의사 회원들은 첩약의료보험 시범사업에 한약조제약사와 한약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국민의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의 건강권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국가가 지정한 100처방 내에서만 환자의 적응증을 확인해 조제할 권한만 가지고 있는 비전문가인 한약조제약사에 의해 조제된 위험한 한약을 국가의 의료보험급여에 포함시키는 것은 국민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첩약의료보험 시범사업과 관련 한의계가 반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범사업의 한약조제약사와 한약사 참여를 합의한 현 집행진의 업무진행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 여부 때문이다.

대한한의사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포함한 한의협 회원들은 지난 9월 김정곤 협회장의 탄핵안이 제기되고 대한한의사비상대책위원회가 협회 업무의 일부를 위임받는 등, 대표성을 상실한 상황에서 협회집행부가 대의원총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업을 진행한 것에 대해 일제히 문제를 제기하고 강력한 반발과 함께 합의 자체가 원천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의사평회원협의회가 지난달 28일부터 협회 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진행했으며, 지난 11일에는 긴급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회장 및 임원진 불신임 안건을 상정해 논의하기도 했다.

내홍이 심화되자 한의협은 “논란의 시발점이 된 지난달 26일 배포된 치료용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 환영 보도자료는 지금까지 건강보험 보장성 부분에서 언제나 소외돼 왔던 첩약 분야에 처음으로 정부가 큰 예산을 투입해 건강보험을 적용키로 한 것에 대한 환영의 뜻이었지, 한약조제약사와 같이 시범사업에 참여한다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한의협은 치료용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에 대한 한의계의 입장은 전국 지부별 토론회를 모두 마친 후 오는 12월 3일로 예정돼 있는 전 회원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는 계획이다.

▽약계 “편협한 직역 이기주의 버려라”
이처럼 한의계가 처방권이 없는 한약조제약사와 한약사를 이번 사업에 포함하는 것은 국민건강에 위해가 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하자 대한약사회(이하 약사회ㆍ회장 김구)가 반격에 나섰다.

약사회는 지난 2일 “한의계가 최근 한약 첩약 보험급여 시범사업과 관련해 약사 직능을 폄훼하고 있다.”며, 편협한 직역 이기주의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약사회는 성명을 통해 “건정심의 결정은 환자의 선택권을 높이는 한편, 보험제도를 통해 첩약의 표준화와 과학화를 촉진하겠다는 정책적 선택인데 한의계가 건정심의 결정에 반발하고, 오히려 한약조제약사의 급여 반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제도 도입의 취지를 호도해 자신들의 이익만 극대화 하겠다는 획책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건정심의 결정은 서양의학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약의 특성을 반영해 국민들에게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이며, 보험제도를 통해 급여의 객관화 기틀을 마련하여 한방의 급여범위를 확대해 나가겠다는 정책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약사회는 “이러한 전후과정을 알면서도 이를 부정하고 오로지 한약조제 자격을 가진 약사의 첩약 급여에만 문제를 삼는 것은 한방의료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은 무시하고 자신의 기득권만을 인정하겠다는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이라고 날을 세웠다.

이어 “첩약의 급여 적용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도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약사를 배척하겠다는 구호가 먼저 나오는 것은 보건의료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전문가의 자세인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한약조제 자격을 가진 약사의 첩약 급여를 반대하고자 한다면, 한의사협회는 즉각 한방분업 논의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약사회는 아울러 이미 100처방 범위에서 한조시약사의 조제가 제도화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일언반구도 없다가 보험급여 시범사업이 결정되고 난 뒤에서야 약사의 조제행위를 문제 삼는 것은 사리에도 맞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후에도 한의계의 비판이 계속되자 약사회는 지난 16일 성명을 통해 “최근 한의계의 치료용 첩약 보험급여 시범사업에 대한 주장은 시범사업을 위해 편성된 건강보험재정 2,000억원이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재원이 아니고 마치 자신들의 것인양 착각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꼬집었다.

이들은 “한의계는 한약조제 자격이 있는 약사와 한약사를 배제하기 위해 첩약 급여를 반대한다며 국민을 겁박하는 행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의계 “처방권 넘보지 말라”
그러나 한의계는 이번 사업에 한약조제약사가 포함되는 것이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약사회가 착각을 하고 있으며, 억지주장까지 늘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의협은 지난 6일 성명을 통해 “약사회는 ‘치료용 첩약 건강보험 시법사업’에 당연히 한약조제약사가 참여하는 것으로 착각해 성명서를 통해 ‘한의계는 직역 이기주의 행동을 중단하라’고 밝히고, 심지어는 이번 시범사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방분업 논의에 참여하라’는 등 억지주장을 내놓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의협은 “보험에 해당되는 특정 상병에 대해 진단조차 할 수 없고, 단지 100종 처방 내에서 가감을 하지 못한 채 매약행위만 하고 있는 한약조제약사들에게 첩약의 건강보험적용은 어불성설”이라며, “보건복지부도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젊은 한의사들의 모임인 참의료실천연합회 역시 지난 16일 “약사회가 치료용 첩약 시범사업에 현재 의료인 중 일부에게만 부여돼 있는 진단권에 대한 욕심을 직접 보여주며 약사도 한의사와 같이 진단권을 행사하려는 속셈을 드러냈다.”고 일침했다.

▽이해단체 반발에 복지부 “시행 어려울 듯”
이번 시범사업이 해당 이해관계자인 한의계 내부에서도 극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약사회와의 갈등까지 야기하자 복지부는 급여화가 힘들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첩약 급여화 방안은 이해단체와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방법 등이 논의되는데, 여기서 협의가 안되면 급여화가 취소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건정심 의결이 이해단체간의 협의를 전제로 통과됐기 때문에, 발전협의체 및 이해단체들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전면 백지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의사평회원협의회가 치료용 첩약에 대한 급여화 방안에 반발하자 한의협은 지난달 30일 복지부에 치료용 첩약 한시적 시범사업 재검토 여부에 대해 질의하자 복지부는 “한의계의 합의없이 첩약 급여화를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지난 11일 열린 한의협 긴급 임시대의원총회에서도 보건복지부 장재혁 건강보험정책관이 “한의계에서 한약조제약사의 참여를 거부하면 더 이상 시범사업은 진행되지 않으며, 2,000억원의 급여예산도 지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장 정책관은 “첩약 급여화가 약사에게 진단권을 넘겨준다거나 한방분업의 전초단계라는 한의계의 우려는 오해”라면서, “건정심에서 첩약 급여화가 논의된 이유는 국민들이 한방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첩약 보험급여 시범사업은 이해단체의 거부로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한의협이 공식적인 입장을 12월 3일 예정된 전 회원 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한만큼 상황은 유동적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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