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쪽의 모 대학에 강의를 다녀오는 길, KTX 내에서 옆자리에 앉은 촌로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다.

같은 마을에 사는 어떤 친지분이신가가 췌장염으로 지역 대학병원에 갔는데 “안 뒤야서” 서울의 모 재벌 병원에 가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저 췌장염인데 지역 대학병원에서 “안 뒤얄”건 또 무엇이며, 재벌 병원에 간다 한들 “뒤얄” 것이 있겠는가?

이분들의 대화가 우리 의료가 안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씁쓸했다.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양극화와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재벌이 동네 빵집, 커피집, 슈퍼마켓까지 장악을 하니 서민 경제는 못 살겠다 난리고, 이제 와서야 정치권도 대책을 마련한다고 분주하다. 그런데 양극화가 경제에만 있나?

지금 소위 빅5병원이 우리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은 전체 의료생태계를 파괴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전체 상급병원 진료비의 35%를 가져가며, 예컨대 외과의 경우 전체 전공의의 3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KTX 등으로 교통이 편리해진 이후 빅5병원들은 지역의 환자들까지 모두 싹쓸이를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지역의 대학병원 등 의료기관은 경영은 물론 의료진의 수련 및 교육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서상 환자들이 “더 유명하고, 더 좋은” 병원을 찾아가는 걸 막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현상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지역 의료전달체계는 고사할 것이고, 지역 의료인의 양성도 어려울 것이며, 그 결과 지역의 의료서비스 질이 하락하고 의료인 및 의료기관의 수도권 집중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또한 환자의 빅5병원 집중은 그 병원들의 의료의 질에도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오명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뿐이다.

임의 비급여 제도를 통한 전체 국민의료비 증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들 병원에서 일하는 분들은 실력도 뛰어나고 성실한 분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이 자신의, 혹은 소속 기관의 발전을 넘어서서 이들 병원의 영향이 전체 의료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알아줬으면 한다.

어떤 의료개혁도 이들 대형 병원들이 나서지 않으면 무망하며, 이분들에게는 전체 의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책임이 있다.

지금 양극화 해소와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정치권은 의료계의 양극화 현상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붕괴해가는 지역의료를 살리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지역 대학 병원들을 거점으로 하여 지역 의료생태계가 생존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아파서 서울로 올라오면 보호자인 가족들까지 따라 올라와야 하고, 이러면 의료비를 넘어서서 숙식과 교통비까지 떠안아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지역에 의과대학을 늘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 이미 있는 의과대학이라도 제대로 운영이 되게 해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빅5병원들도 자신의 역할이 과연 무엇이어야 할지를 고민해 주셨으면 한다. 나는 이중의 어떤 병원이라도 꼭 자신들이 돌봐야 하는 특정한 범주의 환자들만을 택해 의학 발전의 목적으로 진료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의료기관으로 전원시키겠다고 선언하는, 그리고 그에 소요되는 비용은 전부 국가에서 지원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 진정한 연구 병원이 아니겠는가?

이런 특단의 대책 없이 언제 노벨상이 나오며, 언제 세계 의학을 선도하겠는가? 차기 정부가 지역을 살리고, 의생명과학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면 마땅히 이러한 정책을 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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